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장수(長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山西面桐花里) 장터에서 유생 박정주(朴政柱)·안성섭(安成燮) 등의 주동에 의해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고, 이달 22일에 반암면 노단리(蟠岩面魯壇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해 8월경, 서울에서 이충모(李忠模)·김형준(金炯俊)·양재명(楊在明)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여 장수군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병준(張炳俊)을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파견하여, 국내의 제반 정세를 보고케 하고 상호연락 체제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격문 수천매를 등사, 서울의 요소에 살포하여 민중의 봉기를 호소하였다.
1920년 3·1 독립운동 1주년 기념행사로 동지 유진상(兪鎭商) 집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방법 등의 상의하고 격문 2만매를 인쇄하여 대전(大田)·대구(大邱)·마산(馬山)·목포(木浦) 등지에 살포하였다. 또 이해 4월 15일에는 임시정부 1주년 축하문을 만들어 동지 박승래(朴承來)와 함께 서울·장수 등지에 살포하였다. 그리고 이해 8월 중순경,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군자금 납입통지서를 국민회 전주지회(全州支會)로 보내어 장봉한(張鳳翰)으로부터 850원을 모금하였으며, 천도교에서 계몽강연을 하였다.
1922년 2월 15일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며,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43∼5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259·260·261면
- 판결문(1922. 2. 15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