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1913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등교육을 이수한 후 광주(廣州) 소재 영남대학(嶺南大學)에 다니면서 중국정부 참의원(參議員) 부의장 이문치(李文治)와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 김창숙(金昌淑)과 한국 천도교 및 불교 대표 등 3인의 요청으로 그들에게 이문치(李文治)를 소개하였다. 이무렵 그는 다시 손 문(孫文)을 방문하여 조선독립운동 자금으로 20만원을 받아 내는 한편 참의원 및 중의원(衆議員)에서 37만원을 원조받게 되어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1919년 8월 김창숙의 밀사(密使)로 국내에 잠입하여 각지 항일투사에게 그의 밀서를 전달하는 한편 국내 항일운동을 위해 서울에서 김태원(金泰源)과 모의하여 배재고보(培材高普) 동창 다수를 규합하고, 소지금 300원으로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한 후 부단장(副團長)에 선임되었다. 혈복단(血復團)을 중심으로 항일격문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그해 12월 26일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0년 4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 9월 재차 망명하여 유한양행(柳韓洋行) 봉천지점장(奉天支店長)으로 취임하여 재만(在滿) 동포청년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군과 연결하고 후방지원과 정보탐지 등 항일운동을 주도하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3·1운동비사(이병헌편) 869·101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024면
- 동아일보(1920. 4. 15, 1921. 6. 26)
- 판결문(1920. 4. 12 경성복심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