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6. 세칭 (世稱) 명고옥 (名古屋) 황포군관학교 사건 (黃浦軍官學校事件) 의 재중국 (在中國) 연락책임자로 활동(명치 백년사 조선독립운동 (百年史朝鮮獨立運動) 3편 (篇) p.631 및 1934. 6. 19자 (字) 동경조일신문 기사 확인 (東京朝日新聞記事確認) )하고 1937~1940. 8.까지 남경 (南京) 에서 한국국민당 청년단 (韓國國民黨靑年團) 에 가입하여 언론을 통한 활동(일정 (日政) 의 진상을 폭로 (暴露) 하는 책자 발간 (冊字發刊) 등) 하였으며 1940. 9. 광복군 (光復軍) 에 입대 (入隊) 하여 1945. 8.까지 사령부 (司令部) 선전부 (宣傳部) 비서 (秘書) , 선전조장 (宣傳組長)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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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
1930년 상해 유학을 떠나 복단(復旦)대학에 재학 중 1932년 상해 사변이 발발하자 천도교 청우당원(靑友黨員)으로 복단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중국 19로군(中國十九路軍)에 편입하여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한편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하여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37년부터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역보(力報), 항전일보(抗戰日報), 건군반월보(建軍半月報) 등의 잡지에 독립군의 활동이나 독립운동, 또는 일본을 비판하는 등의 원고를 기고하였다. 특히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 하의 조선(日本帝國主義鐵蹄下的 朝鮮)」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 내의 일본 폭정을 폭로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6분교에서 일본어를 교수하였는데 그곳에서 다시 중국 제3전구에 가입하여 대적선전을 담당하였다.
1944년 3월부터는 임시의정원 비서에 임명되었으며, 동년 6월에는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및 편집위원을 겸하여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630 631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61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63·830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8 85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7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34 5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127·128·1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