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안악(安岳)에 조직된 동창청년회(東昌靑年會)에 가입하였으며, 1920년 12월 2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청년회연합회 제1회 창립총회에 의사(議事)로 참가하여 이봉수(李鳳洙)·이예용(李禮用)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또한 1919년에는 이창실(李昌實)과 함께 구월산 패엽사(九月山貝葉寺)에서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5일 송화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4월 5일 출옥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4년에는 북간도에 동계중학(冬季中學)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5년에는 김좌진(金佐鎭)·김 혁(金赫)·나중소(羅仲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여 교육 및 선전부 위원장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선전부 위원장으로서 대종교적 공화주의와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재만한인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민보(新民報)」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민보의 선전활동도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26년 4월 김일성(金一星)·강경애(姜敬愛) 등이 투고한 사설이 적색(赤色)경향을 띠었다고 일본 하얼빈(哈爾濱)영사관에서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신민보의 종사원인 김병희(金炳禧)등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927년 10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2월 28일 가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오래지 않아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2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0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11·519·5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494·496면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513·5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985·9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74·478·927면
- 동아일보(1927.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