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202
성명
한자 金正默
이명 金海山, 金奎煥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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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1.1월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천고(天鼓)(誌)를 저작하였으며 1918.4월에는 만주(滿洲)에서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활동하다가 1919.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의원(議員)으로 피선, 1924년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 신양지국장(瀋陽支局長), 의열단원(義烈團員) 등 활동하다가 1932.4월 윤봉길 의거용 폭탄(尹奉吉義擧用爆彈)을 보관하였다가 거사일(擧事日) 아침에는 여러가지 편의제공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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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람이다.

유교적 영향권이 큰 고장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부터 나라가 외세(外勢)에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하면 마침내 나라도 없어질 것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그대로 따랐다. 유림(儒林)들로부터 받은 그의 국가관은 바로 유교적 정치이념 그대로였기 때문에 여느 유림들이 주창하는 왜양일체(倭洋一體)를 함께 부르짖었다.

1910년 합방으로 인하여 주권이 완전히 상실 당하자 실력으로서 독립을 되찾는 항일 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느낀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한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음을 느끼고 1918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장진홍(張鎭弘)·이국필(李國弼) 등과 함께 향후의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 동북군벌(東北軍閥)인 장작림(張作霖) 정부의 군법처장(軍法處長)직을 맡았으나, 이때 장작림군대는 일제의 괴뢰로서 재만한인(在滿韓人)을 탄압키 위해 일본과 야합하려 하기 때문에 그는 곽송(郭松)과 함께 요동군(遼東軍)을 조직하고 장작림과 교전하였다고 한다. 여건상 불리한 위치에 놓인 요동군은 장작림군의 우세한 전투력을 능가치 못하고 패배하자 그는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해와 북경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중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키 위한 방법이 모색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그는 곧 상해로 거처를 옮긴 후 즉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상해와 노령(露領), 한성(漢城)의 셋으로 나누어져 있던 임시정부는 통합하여 하나로 된 단일정부 아래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각 지방의 대표자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한 방편으로 1919년 4월 30일부터 제4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임시의정원법에 의한 제1차 회의로서 임시의정원법 제1장 2조에 의한 각 도별 지역별로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선산 출신의 그는 산청의 유경환(柳璟煥)·대구의 백남규(白南圭)·성주의 김창숙(金昌淑)·상주의 김동형(金東瀅)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어 참석하였다.

각 지역구 출신 의원들은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개시하여 의장 부의장의 선출 및 임시정부 장정(章程)의 의결, 재원방침(財源方針)에 대한 의결 등 중요안건을 의결하였으며, 국무총리의 선거 법무총장의 보선(補選) 시정방침연설의 청취 등 의정기관으로서 본 궤도에 오르도록 하였다.

동년 7월 7일부터 19일까지 상해 장안리 거류민단사무소에서 열린 5차의 정원회의에서도 그는 백남규·김창숙·유경환·김갑(甲)·윤현진(尹顯振)과 함께 경상도 대표의원으로 참석하였다. 계속해서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 독립운동에 앞장서던 그는 1921년 5월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김창숙(金昌淑)·박순병(朴純秉)·신채호(申采浩) 등과 한문으로 된 월간지 천고(天鼓)를 발행하여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민족정신을 알리고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4년 2월에는 다시 만주에서 독립신문사 길림(吉林) 지국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26년에는 하얼빈에서 의열단(義烈團)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일제 요인 암살과 일제 기관의 폭파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강부약(姜扶弱)·김광선(金廣善)·신익희(申翼熙)·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여 독립당촉성보(獨立黨促成報)를 발행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박멸과 독립운동자의 단결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후에도 북경과 만주, 상해 등지를 오가며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에는 홍구공원에서 장쾌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의사가 거사 당일 그의 집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북경시의 명예비서 등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하며,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영면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9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3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5 95면
  • 기려수필 258 389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8 42 54 152 330 4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8 7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0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 조선민족운동연감 6 16 23 137면
  • 고등경찰요사 87 88 92 101 111 28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 34 14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5 59 68 76 57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8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정묵 자 : 국빈(國賓), 호 : 해산(海山), 이명 : 김규환(金奎煥) 경상북도 선산(善山) -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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