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894년 6월 4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팔을면(八乙面) 금생동(金生洞) 113번지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중국 간도지방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을 회령군에 설치하려고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12월 「임시지방연통제(臨時地方聯通制)」를 공포하고 국내 행정기관으로 연통부(聯通府)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각도에는 독판(督辦)을 두고, 그 아래에 참사(參事)·장서(掌書)·경감(警監)·기수(技手)·통역(通譯) 등의 인원을 두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연통부를 설치하였다.
중국 간도지방의 국민회 계열에서는 함경북도 회령군에 간도 총판부(總辦府)와 연계하여 국민회 지회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최필주는 1920년 음력 5월부터 6월경까지 허익근(許益根)·오순준(吳舜濬)과 함께 최방덕(崔枋德)의 집에서 모여 국민회 지회 설립을 협의하고, 오순준을 지회장으로 선임하고 회원 각자 2엔을 갹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회령군에 임시정부 연통부를 설치 계획이 바뀌게 되면서, 동년 7월 최방덕의 집에서 회합하여 회령군에 독판부를 설치하기로 계획했다.
회령군 독판부에서는 간도에서 권총 등을 가져와 회령의 유지들에게 군자금을 거두었다. 최필주는 1920년 9월 29일 함경북도 경감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김경욱에게 받은 군자금 150원을 낸 6명에게 받은 영수서(領收書) 6매와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社) 휘장(徽章) 6개를 오익렬에게 주었다. 회령군 연통부에서 적극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0년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14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 5월 27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 1922. 2. 27)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9. 27, 11. 18, 1922. 2. 18)
-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11. 16)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별책2권 82~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7권 1248~12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제9권 288~2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