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이운혁은 1919년 함북 경성군(鏡城郡)에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지원을 목적으로 한 연통제(聯通制)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9월 14일 송윤섭(宋玧燮)의 집에서 동지 이상호(李相鎬)·전재일(全在一) 등과 함께 국내와 임시정부와 연락을 위하여 연통제라는 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경성군에 연통제 총감부를, 각면에 사감부를 설치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후 부서를 분담하고 함경북도 대표로 윤태선(尹台善)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서 동아일보(東亞日報)·신건설(新建設) 경성지국(鏡城支局)을 운영하면서 신사상을 연구하여, 대중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경성청년회(鏡城靑年會) 대표로 참석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8월 경성고등보통학교(鏡城高等普通學校) 강당에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조선민족을 부활시키는 것은 첫째 지식을 발달시키는데 있다. 보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다에 떠다니는 기선 하나라도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중략) 현대 조선사회를 개조해야 한다’고 연설하다가 일경에 한때 체포되었다. 동년 10월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에 가입하여 함북책임자로 선정되었다.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이 되었고, 이 무렵 사상단체 전진회(前進會)에 가입하였다. 동년 12월 고려공산동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선임되어 모스크바에 가서 고려공산동맹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1926년 봄 고려공산동맹 교섭 대표의 일원으로 조선공산당과 통일문제를 논의하였다.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2월 조공 제3차 대회(일명 春景園黨)에 참석하여 정치부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러시아로 탈출하여 피신하였다. 1929년 초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울상해파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공 재건운동의 방법에 관해 협의하였다. 조공 재건운동 중앙기관의 위치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상해파 다수파와 의견대립이 빚어지자 서울의 후계중앙위원회와 협의한 뒤 독자적으로 조공재건조직준비위원회(朝共再建組織準備委員會)를 결성했다.
1930년경 러시아로부터 비밀리 귀국하여 조공재건조직준비위를 해소하고 조공재건설정리위원회(朝共再建設整理委員會)로 개편하였다. ‘민족해방협동전선의 임무 및 조선 무산계급운동의 현단계’를 비롯한 재건운동 테제를 다수 집필하였다.
이운혁은 이와같이 활동하던 중 1930년 12월 또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1932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20. 8. 23·8. 31, 1924. 4. 25·9. 9, 1930. 12. 9, 1931. 1. 29)
- 朝鮮日報(1931. 1. 15·1. 28, 9. 1, 1936. 9. 15, 1937. 4. 7)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11. 29, 1925. 2. 9)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985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5권 506~554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7권 317, 403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10권 130, 135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제50권 242면
- 思想月報(朝鮮總督府檢事局, 1932. 10. 15) 제2권 제7호 71~75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334~3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