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씨는 이날 남편 홍원식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발안 장터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이 대량으로 파견되어 보복적인 검거작업을 벌였고 그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 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게 하였다. 이에 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과 함께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有田俊夫)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고주리에서 6명이 죽었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김씨는 일제의 만행으로 김씨의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1운동(김진봉, 교양국사총서 31, 1977) 146~148면
- 3·1운동(김진봉, 교양국사총서 31, 1977) 146∼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7∼1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7~1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