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암살 및 파괴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1월 중국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성사시키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그가 속한 의열단 역시 의열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 4월 김원봉(金元鳳)이 중국 국민혁명의 대본영이 되어버린 광동(廣東)에 머물면서 국민정부와 한중연합을 통한 반제·반일투쟁을 강화할 것을 역설하여 1926년 봄, 장개석(蔣介石)으로부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입교를 허락 받았다.
이에 따라 1926년 3월 김원봉·박효삼(朴孝三) 등 의열단원들과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보병과에 소속되어 전술학·군제학·병기학·군대정치공작 등을 학습하고 10월 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의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초급장교로 임관한 그는 김원봉과 함께 광동에 머물며 의열단을 혁명정당(革命政黨)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동년 12월 일어난 광주봉기(廣州蜂起)에 박건웅 등과 함께 참여하여 반일혁명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27년 4월 왕자량(王子良) 등과 함께 의열단 남창지방집행위원회(南昌地方執行委員會)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동년 8월 남창봉기(南昌蜂起)에 참여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의열단의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장개석의 원조로 김원봉이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 대부실(隊附室) 교관으로 부대교련 등을 담당, 사관생도를 양성·파견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1933년 말에는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육총대(敎育總隊) 제4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1935년 북경에서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한인 부일배(附日輩)를 처단하였고,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서 일제 비밀 정보원인 중국인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경 일경에 붙잡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사상정세시찰보고집(其二) 21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其一) 2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44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6면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 1994) 184·211·216·218·256·264·272·35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44면
- 사상휘보(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5. 9월) 제4호 1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