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대한제국 시절 통신원 주사, 탁지부(度支部) 주사, 세무 주사 등을 지낸 뒤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호세대학[法政大學] 정치경제과를 다녔다.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上海]·톈진[天津]·봉천[奉天, 현재 瀋陽]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여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 위원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에는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동년 6월 조선청년연합회기성회(朝鮮靑年聯合會期成會) 사교부원을 맡았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서울靑年會) 결성에 참여하고, 사상단체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 결성에 참여하여 상무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청년운동과 사상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세칭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 제명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조선청년연합회를 탈퇴했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서 일명 중립당(中立黨)으로 불리는 공산주의단체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을 맡았다.
1922년 9월에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중앙총국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동년 12월 경성양화직공파업을 지원하는 등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다.
한편 그는 1922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상옥(金相玉) 의사와 뜻을 모아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한 의열투쟁을 윤익중(尹益重)·서대순(徐大淳)·정설교(鄭卨敎)·이혜수(李惠秀) 등과 함께 추진하였다. 이때 이들은 1923년 1월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처단과 총독부 및 관공서 폭파, 전국적 항일투쟁 등을 계획하였다. 첫 번째 거사가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였다. 그는 1923년 1월 김상옥의거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 결성에 참가했으며,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 겸 혁명자후원회 책임자가 되었다. 또한 동년 6월 신간회(新幹會)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권 27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63·36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47면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956) 92면
- 韓國民族運動史料(국회도서관, 1976) 中國篇 951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권 161면
- 朝鮮日報(1923. 10. 11)
-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51면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17·220면
- 朝鮮民族運動年鑑(東文社, 1946) 43면
- 東亞日報(1923. 3. 16·5. 13·5. 27·6. 1·10. 11, 1927. 4. 23, 1928. 10. 2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23. 5)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23.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