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고향에서 울산공립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에서는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장개석(蔣介石)의 원조로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한 김원봉은 사관생도들을 모집하기 위해 의열단원들을 중국 각지로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9월 중국 봉천(奉天)에서 김 택(金澤)이라는 인물을 통해 노인(盧仁)을 만나게 된 그는 노인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군관학교 입교를 권유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북경 신가구(新街口) 고묘내(高廟內)에 거주하는 중간 연락책 김규환(金奎煥)을 경유하여 중국 남경으로 가서 1935년 4월 남경 교외 상방진(上方鎭) 황룡산(黃龍山) 소재 천령사(天寧寺)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입교 후 한국혁명·전술학·폭탄제조술·기관총학·사격 등을 습득한 그는 1935년 7월 결성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당원으로 입당하는 한편, 남경으로 이동하여 김원봉으로부터 항일투쟁의 활동방법과 수단 등을 교육받은 후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8월 14일 군관학교 동기생 김병화(金炳華)·김학무(金學武)·김 파(金波) 등과 함께 중국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고 불란서조계 환룡로(環龍路) 태흥방(泰興坊)에서 폭탄 2개를 완성하고 3개째를 제조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중상을 입고 불란서 공부국(工部局)에 붙잡혀 같은 달 21일 상해의 일본총영사관 경찰부로 인계되었다.
1937년 1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1년 2월 4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제2집 5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78·59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90면
- 조선일보(1937. 1. 3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013·1014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