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대동(大同) 사람이다.
1919년 평남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김석황(金錫璜) 등이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을 조직하자, 동단에 가입하여 테러와 암살을 통한 의열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에 따라 동년 7월 평양에서 김석황·김예진(金禮鎭)·장혜근(張惠根) 등 동지들과 회합을 갖고 평남 제3부와 평양경찰서, 그리고 평양부청(平壤府廳)을 폭파할 것을 협의·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8월 3일 오후 9시경, 그를 비롯한 의용단원들은 세 부대로 편성되어 평남 제3부·평양경찰서·평양부청 청사에 각기 폭탄을 투척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제 관공서 폭파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평남 제3부 청사에만 거사가 성공하자, 동지 김효록(金孝祿)과 함께 일경의 검거를 피한 의용단원들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고, 거사에 사용했던 권총과 폭탄을 은닉하다가 8월 20일 붙잡혔다.
1920년 12월 1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장기(長崎)지역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25년 12월 일경에 붙잡혀 1925년 12월 23일 장기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9년 3월 24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간 그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가입하여 천진특구(天津特區)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1938년 2월 한국독립당의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사령(司令),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 부사령(副司令) 등으로 중국인들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8년 2월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 도중, 배 안에서 할복 자살을 기도하여 인천도립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38년 5월 26일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0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62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67면
- 현대사자료(강덕상) 제27권 51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32면
- 동아일보(1921. 2. 27, 1938. 5. 26, 5. 27)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