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강원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때 향리인 양양군 토성면 윤봉리에서 만세시위를 고무하는 격문 '충고동포(忠告同胞)'를 지어 각 마을의 게시판에 붙이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동년 10월초 김형석(金亨錫)의 권유에 의해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양양군단(襄陽郡團)에 가입하였으며, 가입 직후 김연수(金延洙)·문명섭(文明燮)·이석규(李錫圭)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團)을 설치하고, 다시 그 아래 군단(郡團)을 두었는데 양양군단은 강원도단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의 산하조직이었다.
동단의 활동은 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년 10월 하순에 그는 앞서의 동지 김연수·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넘어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이들은 서울의 대한독립애국단 본부를 경유하여 상해로 갈 계획이었으나, 당시 신현구(申鉉九) 등 본부 단원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다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락이 두절된 채 다른 동지들은 귀향하고 그만 혼자 서울에 체류하였다.
서울 체재중 그는 대동단(大同團)이 주도·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그외 선전물을 박화진(朴華鎭)으로부터 전달받고, 이를 지참하고 내려와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57면
- 동아일보(1921. 3. 15)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0∼10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