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8
성명
한자 金星淑
이명 金星巖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8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8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을 주동하다가 징역 8월형을 받은 후 1923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義烈團) 선전부장, 조선민족연맹(朝鮮民族聯盟) 선전부장, 임정(臨政)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출생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전적하였다.

1919년 3월 경기도 남양주군(南楊州郡) 진접면(榛接面) 봉선사(奉先寺)의 승려로 있을 때 같은 승려인 이순재(李淳載) 김석로(金錫魯) 강완수(姜完洙)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라는 명의로 동료들과 함께 격문을 만들었다.

이 격문의 취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그들은 약 200매 정도를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이 독립문서의 살포사건으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1일 그는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그는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는 계기를 이용하여 조직된 합법적 단체인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참석하였다. 노동공제회에서의 그는 충북 괴산(槐山)에서 일어난 소작쟁의(小作爭議)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 조국광복운동에 진력을 다하던 그는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北京)으로 건너갔으며, 여기서 3 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결성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맹하였다. 조선총독(朝鮮總督) 등 일제의 고관(高官) 친일파 거두 매국노(賣國奴) 등을 암살대상으로 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경찰서(警察署)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 등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서 그는 승려신문을 벗어나 선전부장(宣傳部長)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북경에서 광동(廣東) 지역으로 옮아간 그는 1928년에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總聯盟)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북경 광동 등지를 다니며 무력적인 행동으로서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937년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 일 양군이 충돌하는 이른바 노구교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그는 현정경(玄正卿)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결성하였다.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조선민족투쟁동맹(朝鮮民族鬪爭同盟) 조선혁명자동맹(朝鮮革命者同盟)을 연결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조직하여 선전부장(宣傳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광복진영(光復陣營)의 9개 단체는 광복군에 편입되고, 그가 참여하였던 민족전선(民族戰線)의 네 단체는 조선민족의용대(朝鮮民族義勇隊)를 조성하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2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內務次長)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 최동오(崔東旿) 유 림(柳林)과 함께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對列强外交活動)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한편 1943년 4월부터 임시정부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宣傳部)가 설치되었다. 이 선전부에는 총무, 편집, 발행의 3과(課)와 함께 선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사업과 각종 선전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 등 14명과 함께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같은 해 11월 5일 다른 임정요인(臨政要人)들과 함께 중경(重慶)의 임시정부 청사를 철수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12월 1일에는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 진(洪震)·조성환(曺成煥)·신익희·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현(李啓賢)·서상열(徐相烈) 외 9명을 포함한 23명이 상해를 출발 군산(群山)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이튿날인 2일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광복 후에는 혁신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에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9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 354 366 372 37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성숙 초명: 규광(奎光), 호: 운암(雲巖), 법명 태허(太虛), 성숙(星淑), 이명: 충창(忠昌), 창숙(昌淑), 성암(星巖)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 -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징역 1년2월 경성지방법원 1919-05-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원판결취소, 징역 8월 경성복심법원형사제4부 1919-07-1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11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의열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성숙(관리번호:778)
*오류 제목
*오류 유형
*오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