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11 함남 (咸南) 북청군 (北靑郡) 신창면 (新昌面) 의 독립만세 거사를 위하여 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300여매를 동지들과 함께 인쇄하고 3.12 독립만세 시위를 펴고 피신한 후 1920.7월에는 상해 (上海) 임시정부 (臨時政府) 독립공채 (獨立公債) 도합 40,000원 상당을 수령하여 군자금 모집을 하였으며 1921년 신창기독교청년회 (新昌基督敎靑年會) 대표 (代表) , 조선청년회연합회 (朝鮮靑年會聯合會) 등에 가입 활동하다가 독립공채 모집운동으로 1921.3월 피체 되어 혹심한 고문을 받아 빈사상태에서 가석방된지 3일만에 순국 (殉國) (옥중사 (獄中死) 간주)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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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함남 북청(北靑)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에 최문진(崔文鎭)·황하운(黃河雲) 등과 함께 김원섭(金元涉)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300매를 작성하고 이튿날 신창리(新昌里)에서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폈다. 1920년 12월 전국 백여개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청년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대회에 신창기독청년회(新昌基督靑年會)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요원 이 용(李鏞)을 통하여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로부터 인수한 독립공채증서 액면 천원권 10매, 오백원군 20매, 백원권 200매를 합계한 40,000원과 동지들과 왕래한 20여매의 비밀문서 등을 은닉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가석방 3일만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94·5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0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78·9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