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언양(彦陽)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도(天道敎徒)인 이무종(李武鍾)·이규인(李圭寅)·이성영(李成榮)·강경찬(姜庚贊)·최해선(崔海璇)·이규경(李圭庚)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이들은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3월 31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천도교도 최해규(崔海圭) 형제와 곽해진(郭海鎭)·유철순(兪哲淳) 등이 체포되었으나, 나머지 주동자들은 4월 1일 이규인의 집에서 밤이 새도록 태극기 42매를 제작하면서 계획을 강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4월 1일 인근 양산읍(梁山邑)에서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4월 2일 언양읍 남부리(南部里)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 몇 명을 언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자,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공포를 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키려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잔인한 발포로 말미암아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열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는데, 결국 그도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6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이해 6월 2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2·1213면
- 제적등본(1919. 6. 2 대구감옥에서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