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이다.
날로 심화되어가는 일제의 정치적·경제적 침탈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1907년 용문산(用文山)에서 거의하였다.
먼저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김태원(金泰元 : 金準)의 의진에 입대하고 그의 막좌(幕佐)가 되어 활약하였다.
김태원 의진은 1908년 1월 창평(昌平)의 무동촌(舞童村) 전투에서 일본군 괴수 길전 승삼랑(吉田 勝三郞)을 총살하고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한편 의병장 김태원은 호남 창의 대장 기삼연(奇參衍)이 체포되어 순국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더욱 적과 격렬히 접전을 전개하다가 4월에 광주 무등산(無等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오성술은 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全海山)과 더불어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의 잔병은 조경환(曺京煥)이 인솔하였다.
오성술은 적과의 접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나 군자금 모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광주에 거주하는 제등(齊藤)일가를 습격하여 3인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한 후 방화하였다. 그리고 나주(羅州)에서는 밀정 황도현(黃道玄)의 재산을 몰수한 후 살해하였다.
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 대기면(大技面)에 살던 삼십내(森十內)의 집을 습격하여 2,500엔 상당의 물품을 몰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모금 활동이 적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뒤따라 박영근(朴永根)·심남일(沈南一)·강무경(姜武景)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왔다. 이들 중 특히 심남일과는 일찍이 남평(南平)에서 회동하여 군사문제 제반에 걸쳐 상의한 바도 있었다. 오성술은 광주 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후에 공소(控訴)하였으나 기각되어 1910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대구공소원판결문 (1910. 7. 16)
- 관보 (1910. 9. 22)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94·599·60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4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78·6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