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4월 초순 함북 회령에서 나운규 (羅雲奎)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太極旗) 를 제작하며 활동 (活動) 하다 피체 (被逮) 되어 징역 4월을 받고 1920년 북간도 국민회 소속 독립군에 가입하여 일본군 (日本軍) 나남사단 (羅南師團) 과 회령부대 (會寧部隊) 와의 지원연락을 차단하기 위하여 함북 (咸北) 회령 (會寧) 과 청진 (淸津) 을 잇는 회청선 (會淸線) 7호 터널의 폭파와 전선 (電線) 절단을 위해 활동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출옥 (出獄) 후 (後) 에도 나운규 (羅雲奎) 와 함께「큰 무덤」「두만강을 넘어서」등 민족정신 (民族精神) 과 애국심 (愛國心) 을 표현한 영화를 다수 발표하며 활동 (活動)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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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함북 회령(會寧) 사람이다.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나운규(羅雲奎)·이범래 등과 함께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일경에게 붙잡혀 동년 4월 19일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나운규과 함께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여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나운규·김용국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독립군의 국내진공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나남(羅南)의 사단 본부와 회령 수비대간의 교통을 차단코자 회청선(會淸線) 7호터널 폭파 및 전선절단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는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그러나 1921년 1월 나운규와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두 번째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영화계로 진출하여 나운규와 더불어 한국의 영화예술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큰 무덤」, 「두만강을 넘어서」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일제하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나의 고백적 자전(윤봉춘, 1975. 10. 22) 53∼57면
- 한국일보(1973, 尹長老의 인생드라마)
-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1965) 제5권 493·494·4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