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31년 취업과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神戶)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연구소 급사, 백화점 취사부, 우체국 집배원, 세탁소 점원, 신문배달원 등을 전전하며 즙합상공실수학교(葺合商工實修學校)를 거쳐 사립 북신상업학교(北神商業學校)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8년 7월 하순경, 같은 학교 재학생으로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던 최창현(崔昌鉉)·조정규(趙正奎) 등에게 장차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역설하면서, "목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 일본이 경제적으로 파탄, 패전하는 기회를 틈타 한민족의 일제봉기를 솔선 지도할" 유학생회 결성을 제안하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 초순경 신호(神戶)에 거주하던 친형 배원상(裵元相)의 집에서 친목다화회(親睦茶話會)를 명목으로 동지인 최창현·문규영(文奎泳) 등을 비롯해 북신상업학교 한인유학생 박영석(朴永碩)·이종만(李鐘晩) 등 14명과 함께 모여 독립운동을 실제 목적으로 하고 같은 학교 한인학생을 회원으로 하는 유학생회(留學生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1939년 2월까지 전후 십수 회에 걸쳐 배원상·최창현·조정규·문규영·황도열(黃道烈)·박영석·유태열(柳泰烈)·김낙곤(金洛坤) 등과 함께 "한민족의 참된 행복은 민족단결을 굳게 하여 한국기독교의 지도 및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 하에 일본 패전의 기회를 포착,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해야만 가능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여 독립을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항일민족운동에 진력하던 중 1940년 3월에 동지 8명과 함께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16일 신호(神戶)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가혹한 고문과 옥고(獄苦)의 여독으로 출옥 직후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소화특고탄압사(명석박륭) 제7권 35∼37·46∼5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566∼57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21∼7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194∼12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