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905년 여름 원용팔의진(元容八義陣)의 참모종사(參謀從事)로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봉평(蓬坪)에서 활동하였고, 1907년에는 박장호의진(朴長浩義陣)에 참여하여 강원도 낭천군(狼川郡, 현 華川郡)에서 의병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었다.
원용팔은 1905년 9월 중순(음 7월경) 호남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등에게 군사를 일으켜 역적과 오랑케를 토벌하자는 격고문(檄告文)을 발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창의하여 호좌의진(湖左義陣)을 결성하였다.
이때 호좌의진에는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원에서 모인 의병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원용팔은 1905년 11월 원주진위대 김귀현(金貴鉉)의 사주를 받은 일진회원에게 체포되어, 1907년 3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장호는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호는 화남(華南)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강원도 홍천에서 관동의병(關東義兵)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말에는 이강년(李康秊)과 연합하여 경기, 강원지역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며,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추성구는 원주에서 창의하였던 원용팔이 봉평에 도착하자 아들 추병철(秋秉喆)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참모종사가 되어 종군하면서 아들 병철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따지지 않겠으나 다만 의를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추성구는 1907년 경기, 강원도 일원에서 활동하던 박장호의진에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등 북진을 모색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그 후 석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다가 1921년 3월 18일 여생을 마쳤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義士元公乙巳義兵史(朴定洙 編, 191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제1집 260면
- 泰隱集(秋性九, 1978)
- 松窩後集(裵縉煥, 1967)
- 秋氏900年史(추삼술, 1985) 223~224면
- 大韓忠義孝烈錄(大韓忠義孝烈錄編纂委員會, 1979) 卷之上 3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