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시코에서 한인공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1914년 2월 네브라스카주 헤스팅스에서 소년병학교 설립에 참여함.
1920년 1월 서울에서이종철 (李鍾澈)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 방안을 협의하고 평안도 방면을 맡았다가 발각 체포되어 무죄로 석방됨.
이후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2월 국내의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동맹단연회 결성을 독려하고, 동년 6월 동지회 나성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고, 1943~194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신문사 사우로 활동함.
1927~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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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서울에서
이후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2월 국내의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동맹단연회 결성을 독려하고, 동년 6월 동지회 나성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고, 1943~194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신문사 사우로 활동함.
1927~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885년 7월 13일 서울 교남동(橋南洞)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가 일어났을 당시 한인공동회에 참여하였다.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소학교 7학년에 재학하였고, 1913년 헤이스팅스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2월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 유지단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9일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1920년 6월 9월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징역 3개월을 선고받았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7월 2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1930년 2월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재미 한인들에게 동맹단연회에 참여하자고 호소하였다. 같은 해 6월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5월경 독일의 히틀러가 침략전쟁을 일으키자, 미국 국방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와 함께 100달러를 보냈다. 1943~1944년 『독립』의 사우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항일전쟁동정금, 광복군후원금, 군사운동금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납부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20. 7.9)
- 형사공소사건부(刑事公訴事件簿)
- 신한민보(新韓民報)(1909. 10. 27, 1914. 7. 16, 1927. 12. 22, 1930. 2. 20, 6. 12, 1932. 3. 17, 1935. 6. 13, 6. 18, 1937. 2. 4, 7. 29, 1937. 10. 7, 1937. 11. 4, 1938. 3. 31, 10. 13, 1940. 2. 28, 7. 25, 8. 15, 1941. 1. 9, 1942. 1. 22, 1943. 5. 27, 1945. 3. 15, 3. 29)
- 국민보(國民報)(1914. 2. 21)
- 독립(獨立)(1943. 12. 8, 1944. 12. 13)
- 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 1936) 150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2권 449, 547면, 제8권 290면
-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국가보훈처, 2018) 제40권 7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