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그는 1903년 8월 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안정수(安定洙)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05년 11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韓人)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공립협회의 기관지로 창간된「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다. 공립신보는 독립전쟁을 통한 국권회복 후, 공화정 수립을 목표한 민족운동지였다. 그러던 중 1907년 3월에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는 것에 호응하여 임치정·김성무 등과 함께 미주동포를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공립신보」사 내에 의연금 총회소를 설치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미주동포 사이에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교담은 공립협회의 조직 강화를 위해 1908년 1월 7일 국내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그는「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新報社)」에 입사하여 신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공립협회에서 파견된 이재명(李在明) 등이 중심이 된 권장회(勸奬會)가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자 처단을 준비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2월 29일 이재명 등이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이교담은 이 일로 붙잡혔으나, 불기소(不起訴)로 석방되었고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북경(北京)·상해(上海)·운남(雲南) 등지는 물론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을 10여 년 동안 표랑하다가, 1919년 귀국하였지만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在美韓人50年史(金元容, 1959) 85·26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2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658·758面
- 朝鮮日報(1936. 4. 5)
- 共立協會의 民族運動硏究(金度勳, 國民大 석사학위 논문) 26·40·4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1輯 479·486·496·497·524·55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