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24년 2월 5일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 모전자(毛甸子)에서 통의부 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소개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였다.
홍학순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20년 일제의 간도출병 이후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2년 8월에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주요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응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홍학순이 소속된 통의부 의용군은 이 때 대대,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간부 명단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1소대장 김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 이 대한통의부 의용군에서 홍학원은 수차에 걸쳐 국내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5년 음력 3월에는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현정경·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김동삼,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홍학순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盤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에서 홍학순은 1925년 7월 20일에는 제5중대장 김석하의 명령에 따라 장기천(張基千)·김봉수(金奉秀) 등과 함께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방산동(方山洞)에 출동하여 밀정 강영화(姜榮化)·계승호(桂承浩) 등을 총살하였으며, 동월 24일에는 이진무(李振武)·김봉수 등과 함께 구성(龜城)경찰서 조악(造岳)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중위호(重爲好)를 사살하였다. 1927년 8월 18일에는 정의부 5중대원 장기천과 함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평북 의주군 의주읍 식산(殖産)은행 의주지점과 용만(龍灣) 금융조합을 습격하여 현금 982원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1928년 9월 1일에는 2중대원 이원(李園)과 함께 요녕성(遼寧省) 토성자(土城子)에 거주하는 밀정 최상진(崔相振)을 사살하였다. 1930년 9월 9일에는 조선혁명군 제5중대장 이윤환(李允煥)의 의뢰를 받고 평북 삭주(朔州)에 진입하여 군자금 2,300원을 모금하였으며, 1931년 음력 4월에는 봉성현(鳳城縣) 천교구(天橋溝)에서 조선혁명군 대장 이진무의 권유를 받고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여 제5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가담하여 활동한 조선혁명군은 1929년 12월 20일에 결성되었으며, 조선혁명당의 군대이다. 이 조선혁명군은 선언서에서 "국민부로부터 엄연히 분립하여 혁명운동에 대한 군사적 역할을 전적인 임무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조선혁명군은 독립하여 혁명사업에 종사하고 무기는 혁명군인만이 휴대케 한다, 혁명군이 지도기관으로 각 대에서 대표자를 뽑아 군사위원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케 하는데 위원수는 14명으로 한다, 군사위원회에서는 책임자 3명을 선출한다. 그리고 그 명칭을 혁명군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李雄)이 임명되고 종전에 10개 부대로 편성되었던 각 지방군은 7개대로 개편되었다. 홍학순은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주석산(朱石山)·윤하운(尹河運) 등과 함께 의주군(義州郡)에 출동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 1933년 일경에 체포되었다. 홍학순은 1934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4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08․509․521․901면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994~1002면
- 조선총독부관보(1934. 5. 2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50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10~912면
- 동아일보(1933. 6. 23, 1934.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