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평북 삭주에서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부친과 함께 남만주 집안현(輯安縣)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한 대한독립단의 주요 간부의 명단을 보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선전부장 변창근(邊昌根), 검찰장 이태훈(李泰勳) 등이었다.
홍석호가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아울러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의 양성 또한 추진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을 통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무력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한독립단의 계획에 따라 홍석호는 대한독립단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2년에는 일제의 간도출병 이후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동년 2월에 이르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이와 같은 대한통군부가 성립된지 얼마 안되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되고 그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어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홍석호는 이 단체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통의부에서 제4중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그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등을 들 수 있다.
홍석호는 통의부 제4중대장으로서 평북 위원(渭原) 등지에서 일경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1923년 1월 30일 위원군 밀산면(密山面) 남파동(南坡洞)에서 적 경찰 20명과 교전하여 5명을 사살하고, 삭주군 구곡면(九曲面)에서도 교전하여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23년 6월에는 집안현에 주둔하고 있던 홍석호와 그의 부하 15명은 위원 사람 최문섭(崔文涉 , 유격대원으로 무장해제된 자)의 밀고로 동월 23일 대안인 직동(直洞) 적 경찰 30여 명의 습격을 받았으나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한편 1923년 대한통의부가 이념상의 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동년 8월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 중대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참의부(參議府)가 조직되었다. 홍석호도 참의부에 참여하였으며, 1926년 봄에는 김지섭(金志燮)과 함께 제4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참의장 윤세용(尹世茸), 참의장 비서 금남(琴南), 행정위원 이관진(李觀鎭), 계담(桂擔), 비서 강운보(姜雲甫), 서무 정재명(鄭在明), 경무주임 이춘(李春), 교통주임 김우일(金又一), 사법주임 송남형(宋南亨)·조인환(趙仁煥), 학무주임 김백헌(金伯憲), 학무편집 김병조(金炳祚), 재무주임 김창빈(金昌彬), 외무주임 이춘, 사령장 박응백(朴應伯), 훈련장 김지섭, 제1중대장 김선풍(金旋風), 제2중대장 김창빈, 제3중대장 양봉제(梁鳳濟)·심용준(沈龍俊), 제4중대장 김지섭, 제5중대장 박대호(朴大浩) 등을 들 수 있다. 참의부에서 홍석호는 부하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23년 6월 모든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1924년 5월 독립운동단체의 대동(大同)통일을 주장하는 남만군인대표(南滿軍人代表)들의 선언서에 유격대를 대표하여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처럼 활발히 독립운동과 통합운동을 전개하던 홍석호는 1925년 피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2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63․293․295․29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41․46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5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