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경기도 개성(開城) 사람이다
1920년 2월부터 대전청년회(大田靑年會)의 총무로 일하다 1920년 10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1년 5월 안병찬(安秉瓚)이 설립한 사회주의연구소(社會主義硏究所)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념을 연구하는 한편, 이르쿠츠크파 단체의 상해지부에 가입하여 동당 예하의 고려청년회(高麗靑年會) 위원에 피임되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후, 동년 4월 2일 김태연(金泰淵)·박헌영(朴憲永)과 함께 국내에서 반제혁명(反帝革命) 사상을 비밀리에 선전할 목적으로 귀국 도중 일경에 붙잡혀, 동년 5월 3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1년6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4년 1월에 출옥하였다.
출옥직후인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위촉받아 취임하였다.
1925년 4월 박헌영·김단야(金丹冶 : 김태연)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동년 12월 4일 재차 붙잡혔다. 그 후 1928년 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6월을 받아 두 번째의 옥고를 치르고 1930년 1월 1일 출옥하였다.
1931년 2월 이른바 신간회(新幹會) 해소론(解消論)이 비등할 때에, [해소 운운(云云)은 인식착오]라는 제목으로 해산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요지의 비판 논설을 <삼천리>(三千里)지에 기고하여, 신간회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 후 1936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민족지(民族紙)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의 지방부장이 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355∼358·361面
- 呂運亨調書(Ⅰ) 278면
- 呂運亨調書(Ⅲ) 368면
- 金在鳳外19人調書(Ⅱ) 514·515面
- 朴憲永外10人調書 680·682面
- 한국言論年表(1979) 747面
- 삼천리(1931, 2月號) 16·17面
- 新聞便覽(1936) 459面
- 朝鮮日報70年史(1990) 第1卷 146·148·150面
- 東亞日報(1992. 9. 22, 1928. 2. 1, 2. 14, 3. 6∼3. 10, 1930.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