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길림성 환인현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2월 무렵 환인현에서 조맹선(趙孟善)이 조직한 의군부에 가입하고, 백경수(白庚秀)가 이끄는 의군부 제2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유하현(柳河縣)과 통화현(通化縣)·관전현(寬甸縣) 등지에서 의무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 의군부 동지 18명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평안북도(平安北道) 창성군(昌城郡)에 진입하여 군자금 수백 원을 모집하였다. 1921년 1월경에는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입석면(立石面) 부근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하였고, 이어 1월 15일에도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운산면(雲山面) 성초동(聖草洞)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하였다.
같은 해 3월 9일 평안북도 영변군 고성면(古城面) 사도동(沙搗洞)에 잠복하던 중 일제 경찰과 교전하였다. 교전 후 만주로 돌아와 최시흥(崔時興)이 부장으로 있는 광복군 천마산(天摩山) 별영대(別營隊)로 제3중대 박응백(朴應伯)의 부대로 들어갔다.
1922년 3월경 동지들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용림면(龍林面) 사좌동(沙左洞)에서 군자금 모집과 주재소 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7월 7일 함경남도(咸鏡南道) 장진군(長津郡) 상남면(上南面) 삼흥리(三興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9월 하순 무렵에는 희천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1924년 11월 이기영(李基永)과 함께 평안남도 강서경찰서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았지만, 검사의 공소로 1926년 9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강도미수, 강도살인미수’ 등을 이유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3월 2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4. 11. 15, 11. 19, 12. 12, 1926. 5. 24, 10. 2)
- 시대일보(時代日報)(1924. 11. 15, 12. 12)
- 조선일보(朝鮮日報)(1926. 2. 12, 5. 3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제14집 9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