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1년 음력 8월 무렵 대한광복군총영에 가입하고, 6개월 가량 동안 중국 장강성(長江城)과 상하이(上海) 방면에서 약 300명의 동지와 함께 군사 교육을 받고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음력 2월 중 중국 양자구(楊子溝)에 위치한 대한광복군총영 대대장 심은중(沈恩中)의 명령에 따라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음력 3월 무렵 박응백(朴應百) 등 동지 48명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제인봉(濟仁峯)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박응백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해 강계군과 위천군(渭川郡)·초산군(楚山郡)·위원군(渭原郡)·영원군(寧遠郡)·맹산군(孟山郡)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영덕면(寧德面)에서 군자금 모집 도중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1922년 10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과 강도’를 이유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8년 9월 27일 출옥하였다.
1932년 8월 11일 중국 봉천성(奉天省) 통화현(通化縣) 성내에서 국민부(國民府) 제1중대장 강옥성(姜玉成)의 권유를 받고 국민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국민부 부사령부(副司令部) 피복부과장(被服部科長) 장선도(張善道)의 지휘하에 군복을 제조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 해 12월 17일 중국 집안현(輯安縣) 강산2도구(崗山2道溝)에서 강옥성 부대로 편입되었다. 같은 해 12월 20일부터 1933년 1월 4일까지 박용운(朴龍雲), 계용운(桂龍雲)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3년 1월 만주국(滿洲國) 경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2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을 이유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11월 22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동아일보(東亞日報)(1922. 11. 15, 1933. 1. 26, 2. 3, 2. 17, 2. 23)
- 조선일보(朝鮮日報)(1933. 2. 5, 2. 18, 2. 23)
- 매일신보(每日申報)(1922. 11. 15, 1933. 1. 26, 2. 5, 2. 17, 2. 23)
- 신한민보(新韓民報)(1933.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