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함경남도 (咸鏡南道) 함흥군 (咸興郡) 에서 상해 임시정부 (上海臨時政府) 와 연결하여 대원 (隊員) 및 군자금 (軍資金) 모집 (募集) , 불온문서 (不穩文書) 의 배포 (配布) 선전 (宣傳) 등을 위해 대한청년단연합회 (大韓靑年團聯合會) 함경도 의용대 (咸鏡道義勇隊) 를 조직하고 재무계 (財務係) 주임 (主任) 으로 활동하다 1921년 1월 24일 체포 (逮捕) 되어 징역 1년 6개월 (個月) 을 받아 옥고 (獄苦) 를 치렀으며, 1924년 8월 시대일보사 (時代日報社) 발기인 (發起人) , 1925년 3월 함남청년회 (咸南靑年會) 집행위원 (執行委員) 으로 함남청년대회 (咸南靑年大會) 준비위원 (準備委員) , 동년 (同年) 5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준비위원 (發起準備委員) , 7월 함남기자대회 (咸南記者大會) 발기인 (發起人) , 11월 함흥 (咸興) 고용인상조회 (雇傭人相助會) 집행위원 (執行委員) 등으로 활동 (活動) 하였고, 1926년 8월에는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사건 (事件) 의 관련자 (關聯者) 로 체포 (逮捕) 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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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만주일보』지국장을 지내던 그는 1920년 6월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회원 박경구(朴徑九)등과 함께 비밀결사 함경도의용대(咸鏡道義勇隊)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 국내 지부로 조직된 함경도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대원 및 군자금을 모집하고 문서 배포 등을 통한 선전활동을 주요 활동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동 단체의 재무계 주임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 1월 24일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언론과 사회운동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4년 8월 시대일보(時代日報)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한편 1925년 3월 함남청년회(咸南靑年會) 집행위원으로 함남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동년 5월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준비위원, 7월 함남기자대회(咸南記者大會) 발기인, 11월 함흥고용인상조회(咸興雇傭人相助會)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8월에는 조선공산당이 발각될 때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82·964면
- 韓國民族運動史料(국회도서관, 1975) 3·1運動篇 其一 777∼778·842∼843면
- 관계자의 주거씨명, 조선공산당선언 역문(朝保秘제1019호, 1928. 10.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7)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Ⅰ권 분책 544∼545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6권 26·38∼39면
-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1973) 447∼4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