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일찍부터 외세의 국권침탈을 우려하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는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참가하여 간부로서 민지(民智)계발과 부국강병책의 모색에 노력하였다. 그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그는 1903년 홍승하·윤병구·박윤섭·임치정·김정국·안정수·이교담 등에 의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국권회복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 등의 강령을 내세우고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행동을 성토하는 등 활동하였다. 뜻한 바 있어 다시 귀국한 그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그의 애국열성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평양에 거주하는 임기반씨는 금번 국채보상금 문제에 대하여 대세를 일장 연설한 뒤 개탄하기를 나는 가족이 7명이라 각각 1원씩을 출금하여 2,000만 동포 중 일개인의 의무를 면책하노라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부인에게 이상 전말을 설명한 즉 동 부인 최신실씨가 정색하여 책하기를 국가적 관념과 천부적 자유는 사람마다 있으므로 이러한 의무는 내 스스로 이행한다 하고 간직했던 은장도 1개를 즉석에서 연출하매 듣고 보는 자 모두 흠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후 종교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19년 6월 만주 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에서 이기호(李祁鎬), 김사익(金思益)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해 위조지폐의 제작을 시도하였다. 또한 북경에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청년 단원의 모집에 힘을 쏟았다. 한편 1919년 7월 동지 이기호는 경북 안동에서 군자금 46,000원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와 같은 활동사실이 일경에 발각, 동지들이 체포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美洲韓人70年史(해외교포문제연구소) 32面
- 指南(1924. 6) 第6號 5∼7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380·460面
- 在美韓人50年史(金元容, 1959) 4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21面
- 刑事事件簿(大邱地方檢察廳)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410·411面
- 증보판 安島山全書(1999) 44面
- 大韓每日申報(1907. 3. 8)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95·19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