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황해도 수안(遂安) 사람이다.
1911년 7세경 부친을 따라 봉천성(奉天省) 장백현(長白縣) 18도구(道溝)로 이주하여, 12세경까지 동지역에서 학교 교육을 받고, 그 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6년 9월경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장지훈(張志勳)의 권유에 따라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였다. 이제우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이제우가 활동하던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盤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이후 남만주지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과 자치운동을 전개하던 정의부에서 이제우는 1926년 음력 7월 10일경 장백현(長白縣)에 체재하면서 재만동포의 호구 조사를 진행하던 중, 동현 16도구(道溝)에서 정의부 소대장 김경근(金京根)으로부터 최산호(崔山虎)와 함께 밀정 길성룡(吉成龍)과 전모(全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살하였다. 그리고 1928년 음력 6월 26일에는 장백현에서 김경근과 함께 밀정 강영섭(姜永燮)을 처단하는 등 활발한 대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제우는 1931년 5월 11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살인·강도 등의 혐의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동년 6월 1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집 988면
- 조선총독부관보(1931.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