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강원도 횡성(橫城) 사람이다.
1922년 7월 14일 서울 재동에서 홍병기(洪秉箕)·최동희(崔東曦:일명 崔素水)·이동락(李東洛)·김봉국(金鳳國) 등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국내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강상호·장지필·이학찬 등의 주도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가 창립되자 유공삼(柳公三)과 함께 조선형평사에 가입하였고, 조선형평사의 내부 분열시 혁신동맹계(革新同盟系)로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16일 개최된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 임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5년 4월 조선형평사전국대회에서 임시의장 및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 전북 전주(全州)에서 개최된 전라북도형평사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형평운동에 주력하였다.
1925년 6월 중국 동북군벌(東北軍閥)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사이에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의 체결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운동을 주도하던 최동희·정이형(鄭伊衡:본명 鄭元欽) 등은 만주의 정의부원(正義府員), 국내의 천도교도와 형평사원 등을 규합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장춘(長春)에서 최동희와 회합한 그는 고려혁명당 설립에 대해 논의하고 국내의 조선형평사와 천도교연합회(天道敎聯合會)를 중심으로 당원을 모집하는 임무를 띠고 국내로 귀국하였다. 1926년 3월 경성(京城)에서 천도교연합회 간부 김봉국·송헌(宋憲) 등에게 고려혁명당 조직계획을 통보하는 한편,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에서 오성환(吳成煥)을 가입시키는 등 국내 천도교계와 형평사 간부들을 중심으로 당원을 확보하였다. 동년 3월 22∼23일경 이동락과 함께 가입을 허락한 당원들의 위임장을 갖고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도착한 그는 3월 25일 길림에서 김봉국·최동희·이동락·양기탁(梁起鐸)·고활신(高豁信)·이일심(李一心)·주진수(朱鎭壽)·김광희(金光熙)·이규풍(李圭豊)·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의 선언·강령·당규 등을 의논하였으며, 동월 29일 당명을 고려혁명당으로 명명하고 4월 5일 고려혁명당을 창당하면서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고려혁명당 창립후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원조를 받아 만주를 근거로 직접 혁명을 전개할 목적으로 당원 최동희를 파견하여 북경(北京)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과 중국국민당 장개석(蔣介石)을 면담토록 하는 한편, 만주 일대에 당원과 조직 확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의 주요문서를 소지하고 있던 중앙집행위원 이동락이 붙잡힌 것을 계기로 고려혁명당 당원들이 일경에 붙잡히기 시작하자, 정이형 등과 함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재기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7년 3월 하얼빈 전가전(傳家甸) 박경종(朴慶鍾)이 경영하는 농업공사(農業公司)에서 정이형·유공삼 등과 함께 일경(日警)에 붙잡혀 하얼빈총영사관 경찰서를 거쳐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 수용된 후 옥중투쟁을 전개하여 항일의지를 고양하기도 하였으며, 1927년 12월 개최된 제1회 공판에서 정이형과 함께 경어(敬語)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신문에 대해 침묵하여 대답하지 않는 등 시종 공술을 거부하여 징역 7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1928년 10월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5년을 받고 4년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33년 동지 유공삼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第4卷 126面
- 東亞日報(1928. 3. 21, 1928. 4. 22, 1928. 10. 20, 1931. 10. 21, 1933. 10. 10 朝刊)
- 혁명운동가 이동구(조규태), (新人間 568호 1997. 12) 22∼25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34, 269∼271面
- 判決文(新義州地方法院, 1928.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