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함북 부령(富寧) 사람이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동년 10월 만주의 북간도지역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서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군정부(軍政府)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의 중심인물은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性泰)·정신(鄭信)·박영희(朴寧熙)·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성(金星) 등이었다.
1919년 12월 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되었다. 북로군정서의 명칭은 서간도지역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함께 서간도와 북간도 방면의 군정(軍政)을 분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로군정서의 조직 당시의 주요간부를 보면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 경리 계화, 길림분서 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 등이었다.
황륜이 참여한 북로군정서에는 대종교(大倧敎)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은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여 일제를 물리치고 이상국가인 배달국(倍達國)을 지상에 재건하고자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일제를 물리치고 배달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였으며, 관할구역에 살고 있는 재만동포들 역시 혈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북로군정서에서는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무기구입 등에 진력하였다.
황륜은 1919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정면수(鄭冕洙)와 함께 이처럼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신교육, 세계 각국독립사, 한일관계사, 군사학, 무기의 사용법, 부대의 지휘 운영법, 체조 및 구령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졸업 후 소대장에 임명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0년 말 일제의 계속된 추격을 피하여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자유시(현재의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다. 1921년 5,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할 무렵 전로공산당 간부인 오하묵(吳夏默)은 이르크츠크에 있는 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교섭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臨時高麗軍政議會)를 조직하고, 군정의회가 재러시아 한국인의 무장군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에 황륜 등이 참여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중심으로 한 만주 방면의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하던가, 아니면 공산주의 단체를 지지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군정의회 지도부와 대한의용군 지도부는 평화적인 통합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 1921년 6월 27일 양 부대는 충돌하게 되었다. 전투는 고려혁명군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대한의용군측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대한의용군측에 가담했던 황륜은 고려혁명군정의회의 군대에 체포되어 이르크츠크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신문(1923.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