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함북 종성(鍾城) 사람이다.
1918년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진일사(眞一社) 화령평(花嶺坪) 농동(農洞)으로 이주하여 진명학교(震明學校) 교사로 독립의식 고취와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용정(龍井)에서 북간도 최대 규모의 3·1운동 집회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북간도 각 지방대표들은 '3·13운동'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는데, 조선독립기성회의 주요 인맥은 1910년대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 활동을 통해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면서 회의 명칭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고 대한국민회 규칙에 "임시정부 법령 범위 내에서 독립사업 완성을 기도함을 목적"한다고 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대한국민회는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에 본부를 두고 8개 지방회와 지방회 산하 130여개 지회를 두어 북간도 전역의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 편성, 군자금 모집 등 폭넓은 항일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대한국민회 동부지방총회(東部地方總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동년 12월 허영장(許令將) 등과 함께 중국 국자가(局子街) 부근 걸만동(傑滿洞)에서 동지(同地) 조권식(曺權植)·최광호(崔光浩)와 더불어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국민회 총본부로 송금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들에게 소위 '요주의불령선인(要注意不逞鮮人)'으로 감시대상이 된 그는 1920년 1월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원들의 조선은행(朝鮮銀行) 회령지점(會寧支店) 현금 탈취사건으로 용정(龍井) 일본영사관 경찰들이 중국 경찰과 합동으로 수사할 당시, 그의 집은 가택수색을 당하고 가족들은 구타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1920년 2월 동부지방총회 경호구장(警護區長) 겸 서기 엄주철(嚴柱喆)에게 권총을 지급하여 부하들에게 분배케 하였으며, 동년 4월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군총 30정을 구입하여 대한국민회 총본부에 공급하는 한편, 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한인대표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는 [지나관상신보각계제군(支那官商新報各界諸君)에 경고(警告)함]이란 글을 중국인에게 발표하였다.
동년 5월 영안현(寧安縣)과 국자가 일대에서 부하 조권식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6월에는 장암동지회(獐巖洞支會) 경호원 이병순(李秉順)과 남동빈(南東彬)에게 명하여 나자구(羅子溝) 방면에서 운반해 온 다수의 무기를 인수하였고, 8월에는 부하 20여 명을 무장시키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1920년 10월 군자금 조달을 기획하던 중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 토벌대가 중국내 한인촌을 습격하고 한인들을 학살하자, 동 소식을 접한 그는 일본군 토벌대를 피해 연길현 장암동(獐巖洞) 부근에 잠복하였으나, 동월 30일 일본군 보병 제15연대가 이른바 '장암촌소탕작전'을 전개할 때 대한국민회 간부 최설(崔卨)·이동빈(李東彬) 등과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統治史料(金正柱) 第2卷 459·461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분책 261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175·221·270·271·376·42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7卷 298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8卷 456∼460面
- 北間島地域 獨立軍團名簿(國家報勳處) 10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