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19년 3ㆍ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청년당(大韓獨立靑年黨)에 가입하고, 1923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경무국원(警務局員), 국민부(國民府)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혁명군은 1927년 9월 정의부(正義府) 중앙회의(中央會議)에서 정의부 의용군(義勇軍)의 명칭을 조선혁명군으로 변경하였으며, 1929년 4월 정의부 주도세력이 국민부를 결성하자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낙규는 1932년 6월 김광해(金光海)ㆍ김궁민(金弓民)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광산 부호 최창학(崔昌學)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시도했다. 1932년 9월에 김일봉(金一鳳)ㆍ장인준(張仁濬)ㆍ박봉수(朴鳳洙)ㆍ김병수(金炳洙) 등과 적극적인 군자금 모집 활동과 국내 연락망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1월에는 삭주군(朔州郡) 남면(南面) 용당동(龍唐洞), 12월에는 삭주군 영풍면(水豊面) 연풍동(延豊洞)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33년 2월 7일 덕천경찰서가 장인준과 김일봉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김일봉이 폭약(爆藥)을 깨물고 자결(自決)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명 '덕천사건'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변낙규는 대원들에 대한 검거가 진행되자 피신하였으나, 1933년 4월 14일 태천서원(泰川署員)에 체포되었다.
1933년 8월 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506, 507면
- 每日申報(1933. 2. 26, 4. 15, 4. 18, 5. 26, 6. 11, 6. 21, 6. 25, 7. 1, 7. 19, 7. 29, 8. 5, 8. 11)
- 朝鮮中央日報(1933. 4. 14, 4. 15, 6. 5, 7. 20, 7. 28, 7. 30, 8. 11)
- 新韓民報(1933. 6. 22)
- 朝鮮日報(1933. 7. 19, 7. 28)
- 해외수집자료-대만편(국가보훈처, 2012) 23집 201~203면
- 大韓統軍府 職員簿(1923. 5. 2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6)
- 騎驢隨筆(宋相燾, 1955)
- 臺灣日日新聞(1933. 2. 20)
- 東亞日報(1921. 7. 22, 1933. 2. 26, 3. 8, 4. 14, 4. 15, 4. 19, 4. 29, 5. 14, 5. 17, 6. 10, 6. 23, 6. 24, 7. 4, 7. 19, 7. 28, 8. 11, 8. 26, 1934.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