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1914년 음력 1월 말경 부친 장승열(張承說)과 함께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이주하였으며, 1927년 음력 8월경에는 동현 유황구(柳黃溝)에 거주 중 정의부(正義府) 지방공소(地方公所) 총관(總管) 이월노(李月老)의 권유로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그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장태국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盤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장태국은 1927년 음력 11월 초순경까지 관전현 유황구 십가장(十家長)에게 권유하여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의무금 대양전(大洋錢) 12원을 징수하였다.
장태국은 1932년 12월 7일 밤에는 평북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도령동(都嶺洞) 황천겸(黃天謙) 집에 가서 금 41원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3년 3월 13일 체포되어 평북 의주경찰서 옥강(玉江)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던 중, 동월 14일 오전 5시경 경찰서 내에 방치해 두었던 권총을 가지고 순사를 사살하고 도주하였다.
장태국은 이 사건으로 1933년 9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33년 10월 10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3. 9. 29. 평양복심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12면
- 동아일보(1933. 10. 3,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