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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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炳國
이명 金仁植, 金龍雲, 金秉國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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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애국장
1920년경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입단해 지방통신원(地方通信員)으로 활동하고, 1921년 9월 동단(同團) 의용대(義勇隊) 향무부교(餉務副校)함남(咸南)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함정포리(含井浦里) 소재 주재소(駐在所)를 폭파하고 자금 및 무기를 획득했으며, 동년 11월 국민단(國民團) 소속으로 함남(咸南) 삼수군(三水郡) 운전리(雲田里) 소재 주재소(駐在所)를 폭파하고 무기를 수합했으며 주재소 부근 전신주를 파괴하고, 1922년 음력 윤5월 광정단(光正團) 소속으로 동군(同郡) 호인면(好仁面) 영성리(嶺城里) 소재 주재소(駐在所)를 공격하고 자금 및 무기를 거두었으며, 1923년 음력 2월 동단(同團) 제3(署) 경시(警視)에 임명되고 동년 9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고 1937년 3월 가출옥(假出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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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출옥(假出獄) : 가석방의 전 용어, 형기가 끝나지 않은 죄수를 일정한 조건하에 미리 풀어주는 것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광정단은 길림성(吉林省) 장백현(長白縣)에서 성립된 통합 독립군단으로 1922년 4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의 일부가 통합하여 조직하였으며, 임강현(臨江縣),무송현(撫松縣) 등 압록강 주변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함께 이주한인의 산업발전을 도모하는 활동을 하였다.

단장은 윤덕보(尹德甫), 부단장 강진건(姜鎭健), 총무 이태걸(李泰杰), 비서 한운섭(韓雲燮), 재무부장 이병율(李秉律), 군사부장 강승경(姜承京), 서무부장 강구쇠(姜九釗), 경호부장 최진용(崔鎭鏞), 의사부장 김문보(金文甫), 권업부장 강명하(姜明河), 문화부장 한동초(韓東超), 통신부장 겸 회계부장 임태선(林泰仙), 위생부장 김진열(金振烈) 등이었다.

1924년 초부터 조직의 체제를 위원제(委員制)로 바꾸고 주변의 이주 한인을 대상으로 한 자치활동에 치중하였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는 방침 하에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고본계(固本契) 등 7개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을 전개해 동년(同年) 11월 군정부(軍政府)인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김병국은 함경북도 풍산군(豊山郡) 웅이면(熊耳面) 문탕평리(文藻坪里) 출신이며, 장백현 14도구(道溝) 탕성리(湯城里)에 거주하였다. 1920년경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입단해 지방통신원으로 활동하고, 1921년 9월 동단(同團) 의용대(義勇隊) 향무부교(餉務副校)로 함남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함정포리(含井浦里) 소재 주재소를 폭파하고 자금 및 무기를 획득하였다. 1921년 11월 국민단(國民團) 소속으로 함남 삼수군(三水郡) 운전리(雲田里) 소재 주재소를 폭파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며 주재소 부근 전신주를 파괴하였다. 1922년 음력 윤5월 광정단(光正團) 소속으로 동군(同郡) 호인면(好仁面) 영성리(嶺城里) 소재 주재소(駐在所)를 공격하고 자금 및 무기를 거두었으며, 1923년 음력 2월 동단(同團) 제3서(署) 경시(警視)에 임명되고 동년 9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병국은 소위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으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권 321면
  • 判決文(平壤覆審法院:1925. 10. 20)
  • 假出獄關係書類(국가기록원 소장)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25. 3. 24)
  • 朝鮮日報(1925. 3. 24)
  • 新韓民報(1926. 8. 1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7집 1308~1309, 1313~1314, 1318면
  • 중국지역 사료수집 목록(국가보훈처 소장) 제9권 29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병국 김병국(金秉國), 김인식(金仁植), 김용운(金龍雲) 함경남도 풍산(豊山) 함정포리경찰주재소 습격, 운전리경찰관 주재소 습격, 영성리경찰관 주재소 습격
본문
1894년 1월 20일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웅이면(熊耳面) 문조평리(文朝坪里)에서 출생하였다. 4남 1년 중 장남이며, 13세부터 약 2년간 서당 교육을 받았다. 이명은 김병국(金秉國), 김인식(金仁植), 김용운(金龍雲)이다. 1920년 11월경 고향을 떠나 서간도 창바이현(長白縣)으로 건너가 재만 독립군단인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입단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은 함경도 출신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감시가 심한 국내보다는 체계적이고 활동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서간도로 망명해 1919년 5월경 조직한 항일 독립군단이다. 단장은 이희삼이며, 주요 인물은 김동준, 김찬, 이동백 등이다. 창바이현은 수십 개의 협곡을 가진 지역이었다. 따라서 군비단은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본부를 17도구(道溝)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두고, 본부와 통하는 중요 계곡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해 대원들을 배치하였다. 군비단 통신사무국의 국원에 임명되어 본부와 지단, 지단과 지단간의 연락 업무를 수행하였다. 입단한 지 약 10개월이 지난 1921년 9월, 군비단 의용대 제1중대 3소대 1분대 분대장인 김병묵(金秉默)의 인솔하에 9명의 대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이 유격대의 향무부교(餉務副校)의 직책을 맡았다. 9월 16일 본부를 출발해 국내로 잠입한 유격대는 23일 밤, 함남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신흥리(新興里)에 도착하였다. 야음을 이용해 새벽 2시경 같은 면의 함정포리(含井浦里)로 이동한 유격대는 대원들을 2개조로 나누었다. 분대장 김병묵이 지휘한 1조는 일제의 함정포리경찰관주재소와 영림창을 맡고, 다른 한 조는 면사무소로 침입하도록 작전 계획을 짰다. 두 조는 동시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주재소로 들어 간 1조는 순간적으로 사격을 가하고 폭탄을 투척해 일경들이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순사부장 고바야시 세이지小林淸治와 한국인 소사 1명을 사살하고, 장총 5정과 권총 1정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주재소와 영림창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 면사무소로 향한 다른 조는 숙직 중인 면서기에게 독립군임을 알려 스스로 군자금 49원을 내도록 해 받아냈다. 작전을 끝낸 유격대는 전원 무사히 창바이현의 본부로 귀대하였다. 통신원으로 입단해 유격대원이 된 후, 이 같이 활발히 국내 진입전을 벌이고 있을 때, 군비단은 좀 더 효율적인 무장 활동을 펼치려고 주변의 독립군단과 통합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음)9월 푸쑹현(撫松縣)에 근거지를 가진 흥업단(興業團)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만들었다. 대한국민단의 단원이 된 후, 같은 해 11월에는 소대장 김성연(金成淵)이 편성한 유격대에 가담해 국내 진입전을 펼쳤다. 이때도 역시 부교의 직책이었으며, 26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유격대였다. 이들 유격대는 11월 8일 자정, 함남 삼수군(三水郡) 호인면(好仁面) 운전리(雲田里)로 들어와 그곳에 있는 일제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성연의 지휘를 받은 유격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 토미마쓰富松辨四郞와 아라타新田常太郞를 저격해 물리치고, 자위단원(自衛團員) 10여 명을 항복시킨 후 “대한민족은 곧 독립할 것이다”라는 연설을 한 후 장총 2정과 권총 1정 및 탄약을 전리품으로 수거하였다. 이어 주재소에 방화해 전소시킨 뒤 이번에도 전원 무사히 본부로 귀대하였다. 대한국민단은 이듬해 4월, 안투현(安圖縣) 흥도자(興道子)에 근거지를 가진 대진단(大震團), 그리고 같은 창바이현에 본부를 둔 태극단(太極團)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성립시켰다. 단장 윤덕보(尹德甫), 부단장 강건(姜健), 총무 이한평 등으로 이루어진 최고지휘부인 총부(總部)를 장백현 17도구 동평덕리에 설치하였다. 이전 단일 독립군단일 때보다는 한층 방대한 관할 지역을 확보하고, 침략자 일제를 상대하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광정단에서는 군사부에 소속되었고, 부장(部長) 바로 아래의 서열인 차장(次長)에 임명되었다. 1922년 9월 하순 군사부장의 명을 받고, 소대장 강남경(姜南京) 등 30여 명으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9월 25일 새벽, 삼수군 호인면 영성리(嶺城里)에 도착해 유격대를 3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2개 조로 일제의 영성경찰관 주재소를 앞뒤에서 완전 포위한 뒤 순간적인 기습 공격을 가해 근무 중이던 일제 경찰 마쓰이 다카시(松井孝)와 호리우치 소우조堀內宗三·김동정(金東挺) 등을 저격 처단하였다. 민가로 향한 나머지 1개 조는 순사가 되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석윤(李錫潤)의 집과 마을의 제일 부호인 김경조(金瓊祚)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53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주재소의 통신 차단을 위해 전봇대와 전선을 파괴하고 절단한 후 작전을 마치고 본부로 귀대하였다. 1923년 (음)2월부터는 창바이현 14도구에 설치된 지방조직인 제3서(暑)의 경시(警視)에 임명되었다. 지방조직으로 옮겨온 뒤부터는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척결 등에 치중하였다. 그해 9월 친일파들의 집을 돌며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일제의 군경에 의해 붙잡혔다. 당시 아내 주(朱)씨와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함흥지방법원에서 1심, 경성복심법원에서 2심을 거쳐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7년 3월 20일 가석방되어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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