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북 창성(昌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평북 창성군 읍내(邑內) 서문 밖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 신용철(申容澈)·강이달(姜利達)·선우 명(鮮于明)·문창수(文昌洙)·한선학(韓善學)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에 중국 안동현(安東縣) 구시가(舊市街) 풍순전(豊順錢)에서 국내에서 활약하던 학생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신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재에 안병찬(安秉瓚), 단장 함석은, 서기 장자일(張子一), 간사 박영우 등이며, 주요 구성원은 20대 청년들이고, 근대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하였으며, 출신지는 대부분이 평북지방이다. 강제하가 활동한 대한독립청년단은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하여 임시정부의 입장을 널리 선전하였다. 이 때 강제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관공리(官公吏)의 사직을 권고하는 경고문을 배포하였다. 1920년 9월에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 방문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정 운(鄭雲)과 함께 국내에 들어가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강제하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권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22년 8월 30일 남만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결성한 것이다. 이 단체의 주요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검무국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강제하는 1924년말부터 1925년초에는 통의부에서 재무부장으로서 중앙위원장 현정경 등과 함께 일하였다. 1924년에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강제하가 가입하여 활동한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 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정의부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 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 재정분과위원 김 호(金虎)·윤덕보·승 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한편 정의부가 발족된지 수개월 후인 1925년 말부터 정의부 자체에 심한 내분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정의부 지도자 이상룡(李相龍)의 임정국무령(臨政國務領) 취임문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25년 7월 4일 임시의정원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국무령제를 신설하고, 국무령에 이상룡을 선임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25년 9월 24일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 내각을 조직하였다. 조직 명단을 보면 만주 지역 주요 단체의 지도자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상룡의 이러한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삼시협정(三矢協定) 등으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계가 상당히 난관에 봉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만주독립운동계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시위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5년 12월 화전현(樺甸縣)에서 개최된 정의부의 제2회 중앙의회에서 이 문제를 갖고 갑론 을박하다 결국 이상룡을 추선한 중앙행정위원회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고, 이에 중앙행정위원회에서는 1926년 1월 중앙의회의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행정위원인 간부들은 행방을 감추고, 다만 전(前) 중앙의회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만이 남아 1926년 1월 비상수단으로 비상의회격인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를 개최하였다. 군민대표회에서는 전만통일회에서 제정한 기존의 헌장을 폐지하고 1926년 1월 24일 정이형(鄭伊衡)·양세봉(梁世奉) 등 의용군 대표 6명과 이해룡 등 지방대표 11명, 현익철(玄益哲) 등 중앙민의(民意)대표 3명 등 대표회원의 연서로서 결의사항을 포고하고 58조로 된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여 동월 26일부터 시행하기로 하는 등 정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포고내용을 보면 정의부의 명칭을 그대로 두고 중앙의회의 성립을 볼 때까지 대임위원 및 중앙행정위원을 선거하였는데, 이 때 강제하는 대임대표회(代任代表會) 위원으로 이해룡·현익철과 함께 임명되었다. 이들은 행정당국을 감사하고 당국의 필요한 요구를 승인하고, 행정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사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의부의 이러한 내분과 지도부의 이탈은 결국 정의부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의부는 1926년 10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17일 간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제3회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김이대(金履大)를 의장으로 박범조(朴範祚)를 부의장으로 선거하고 의사를 진행하였다. 이 회의에서 정의부는 다시 헌장을 개정하는 한편, 중앙위원을 5명에서 11명으로 증원시키는 동시에 위원을 개선하였다. 이 때 강제하는 현익철·김동삼·김원식(金元植)·김 철(金鐵)·이 욱(李旭) 등과 함께 새로이 선출되어 종래의 내분과 대외분쟁을 일소하고 각파 합동으로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편 강제하는 정의부에서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정의부에서는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고,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여 활동할 때, 강제하는 화성의숙의 재무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28년 5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었을 때, 정의부 대표로 이청천·이관일(李貫一) 등 대표들과 함께 참여하여 만주 지역 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9년 3월 1일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창당을 위한 회의에서 현익철·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40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88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26·128·15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5·262·2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32·437·488·497·5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46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23·72·28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