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5월 군무부 (軍務部) 소속으로 대원 49명을 이끌고 함남 (咸南) ,함북 (咸北) 일대에서 군자금 및 대원의 모집에 종사하였고 1920년 12월 노령 (露領) 에서 임시대한독립군 (臨時大韓獨立軍) 을 조직, 1921년 12월 16일 제2중대장(또는 제3대장)으로 문창학 (文昌學) , 김학섭 (金學燮) 등과 일제의 신간원수비대 (新乾源守備隊) 및 경찰서 (警察署) 습격전에 참가하였고, 이로 인해 궐석재판 (闕席裁判) 에서 사형 (死刑) 을 받았으나 체포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상해 (上海) 에서 국민대표회의 (國民代表會議) 에 참석하여 독립운동 (獨立運動) 의 활성화에 노력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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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함북 종성(鍾城) 사람이다.
북간도지역에서 대한독립군 제3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7년 3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훈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촌에 있는 북일(北一)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강석훈은 1920년 5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소속으로 대원 49명을 이끌고 함경남북도에서 군자금 및 독립군 모집 활동에 종사하였다.
같은 해 12월 초순 노령(露領) 시지미 강용관(姜龍官)의 집에서 임시대한독립군(臨時大韓獨立軍)이 조직되자 문창학(文昌學)·최시능(崔時能) 등 15인과 함께 대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같은 달 4일 제3대장으로 문창학·김학섭(金學燮) 등과 일제의 신건원(新乾源) 수비대 및 경찰서 습격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1년 1월 5일 오전 1시에는 일본 수비대와 경찰서 주재소를 습격하여 교전 40분만에 순사 5명을 사살하였다.
그는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체포되지 않고 같은 해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假出獄關係書類 第262卷內 保存 判決文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170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179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7卷 115面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96·97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90·391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全卷 53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330·412面
- 吉林新聞(1990.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