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92
성명
한자 金尙台
이명 金景六, 金相台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896년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당시 전국도창의대장(全國都倡義大將)이던 이강년(李康秊)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아 그의 중군대장(中軍大將)으로 활약중 호좌사(湖左帥) 유인석(柳麟錫)도만(渡滿) 3년만에 귀국함

2. 1905년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더부러 제천(堤川)에서 기병하여 각지에서 활동함

3. 1907년 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다시 제천(堤川), 단양(丹陽)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흥(順興), 봉화(奉化), 풍기(豊基), 영춘(永春), 영월(寧越) 등지에서 활약중 1908년 이강년(李康秊)피체됨으로써 군사지휘권(軍士指揮權)인계(引繼)밭아 소백산맥(小白山脈)근거(根據)로 하여 일경(日警)일헌(日憲)교전(交戰)하기 무려 50여회에 (達)

4. 1909년 3월 단양군내(丹陽郡內) 순사 주재소(巡査駐在所)습격(襲擊)하여 순사(巡査) 2(名)사살(射殺)

5. 1911년 5월 종사(從事) 우중수(禹中守)간계(奸計)순흥(順興)남목리(南木里)에서 피체(被逮)되어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압송(押送)

6. 1912년 3차(三次)에 걸친 신문(訊問) 끝에 삼년(三年)선고(宣告)를 받자 그는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여 순사(巡査)의 칼을 빼어 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날부터 폐구불식(閉口不食)으로 날을 보내니 일인(日人)기계(機械)로서 입을 비집고 음식(飮食)을 먹일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절식(絶食) 13일인 7월 28일에 옥중(獄中)에서 사망(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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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그 지방에서 양반으로 행세하였으며, 명망도 높았다. 이를 기반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한 인물이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李康秊)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 유인석의 중군장이며 가장 신임 받던 제천 의병장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순절하자, 유인석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때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그 해 4월 그들이 영춘 고을 용소동(龍沼洞)에 머물렀을 때 밤중에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아 군사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이강년이 부상당하였다. 김상태는 백남규(白南奎)와 함께 청풍·단양 등지의 정두용(鄭斗容)·이진원(李進源)·신태원(申泰元)·조동기(趙東驥) 등의 집을 전전하면서 치료해 주었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이강년은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김상태가 4군 방면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 "공께서 만일 끝내 여러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리신다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돌아가겠다." 고 강권하여 추대받기에 이른 것이다. 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강년은 군대를 재편성하여 김상태를 중군, 백남규를 우선봉, 하한서(河漢瑞)를 좌선봉으로 삼았다. 후에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되었을 때 "후일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한 말은 바로 김상태를 지칭한 말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강년과 김상태의 관계는 남다른 관계이었다. 그는 이강년과 함께 순흥(順興)·봉화(奉化)·풍기(豊基)·영춘(永春)·영월(寧越)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일인들은 기계로 그의 입을 열어 먹이고자 하였으나, 1911년 9월 21일 순국하였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234·250·263·264·301·384·50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2·83·196·23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09·221·239·244·245·250·256·279·2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86·533·6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5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38·575·582·604·762·81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33면
  • 조선독립운동연감 24면
  • 고등경찰요사 8·12면
  • 기려수필 125·126면
  • 김상태체포전말보고서(일헌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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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상태 본명 : 김상호(金相鎬), 자 : 경륙(景六)·정륙(正陸), 아호 : 백우(白愚) 충청북도 단양(丹陽) 전기의병(이강년), 후기의병(이강년)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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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강도, 강도와주, 강도, 살인교사 교(絞)에 처함 대구지방재판소형사부 1911-08-04 국가기록원
2 판결문 강도, 강도와주, 강도, 살인교사 공소 기각 대구공소원형사부 1911-08-3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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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제천의병묘소 충청북도 제천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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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2 비석 순국 김상태의병장 충절비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3 사당 충절사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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