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충북 (忠北) 제천 (堤川) 에서 정운경 (鄭雲慶) 이 기의 (起義) 하자 동지 (同志) 들과 함께 입진 (入陣) , 군사 (軍士) 를 모집 (募集) 할 때 단양 (丹陽) 제천 (堤川) 영춘 (永春) 청풍 (淸風) 등지에서 300~400명 (名) 이 모여 들어 의진 부서 (義陣部署) 를 정 (定) 하여 전투 준비 (戰鬪準備) 를 갖추기 전 (前) 에 원주진위대 (原州鎭衛隊) 의 불의 습격 (不意襲擊) 으로 정운경 (鄭雲慶) 이 피체 (被逮) 되어 해진 귀가 (解陣歸家) 하고 있다가 1907.7월 충북 (忠北) 제천 (堤川) 에서 이강년 (李康秊) 의병대장 (義兵大將) 이 재거의 (再擧義) 할 때 입진 (入陣) 좌종사 (坐從事) 로 임명 (任命) 되어 활동 (活動) 하다가 충북 (忠北) 단양 (丹陽) 경계 (境界) 를 파수 (派守) 하는 명 (命) 을 받아 수행 (遂行) 하고 1908.6월 청풍 (淸風) 까치성 (城) 에서 이강년 (李康秊) 이 부상 (負傷) 피체 (被逮) 되어 해군 (解軍) 될 때까지 종군 (從軍)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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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05년 충북 제천에서 정운경(鄭雲慶)이 기의(起義)하자, 이규현(李圭顯)·강란수(姜蘭水)·강순희(姜順熙) 등과 함께 입진(入陣)하여 군사를 모집하였다. 이때 단양(丹陽)·제천(堤川)·영춘(永春)·청풍(淸風) 등지에서 4백여명이 모여들어 의진(義陣)의 부서를 정하고 전투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중 원주 진위대(鎭衛隊)의 예기치 못한 습격으로 정운경 의병장이 영춘에서 붙잡히는 바람에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1907년 7월 7일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 의병대장이 재거의하자 입진(入陣)하여 좌종사(坐從事)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충주성이 또다시 왜군의 공경으로 함락되어 재차 진용을 정비할 때, 충북 단양경계를 파수(派守)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1908년 6월 4일(음) 충북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대장이 중상을 입고 왜군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전세가 흐트러져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일문화(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2. 12. 31) 15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58·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3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307면
- 운강이강년선생약사(기념사업회, 1980. 3. 10)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