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32년 3월 22일 밤 덕진면 운암리 청년회관에서 문사훈(文士勳) 외 4명은 청년 수십 명에게 지주와 마름의 임의적인 소작권 변동 문제를 비판하고 소작권 변동 방지대책을 논의했다.
한편 4월 18일 오전 11시경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뒷산에서 최판옥(崔判玉), 김판권(金判權) 등은 비밀결사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靈巖共産主義者協議會)를 조직했다. 단체의 산하에는 교양부, 내부조직연락부, 외부조직연락부, 출판부를 두고 역할을 분담했다. 이들은 5월 1일 노동절 기념행사는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해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음력 5월 1일인 6월 4일에 노동절 기념행사를 하고 농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6월 4일 영보리 영보정에 주변 마을의 청년 70여 명이 모였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최판옥과 김판권은 최중렬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운암리와 백계리 지역의 소작분쟁에 대해 투쟁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청년들은 소작인들과 소작권 변동 방지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곧바로 기(旗)를 앞세우고 투쟁 행진을 시작했다. 최중렬을 비롯한 청년들은 큰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며 노동가를 불렀다. 그리고 대오를 정돈해 산을 내려와 운암리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최중렬은 영암군 덕진면의 일명 ‘영보정사건’소작분쟁 투쟁에 참가했다가 체포됐다.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가택침입(家宅侵入), 폭력행위(暴力行爲) 등 처벌(處罰)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30원 납부를 선고받았다. 이후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확정 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4. 3. 7)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3. 9. 16,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