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491
성명
한자 沈龍俊
이명 沈龍濟, 沈士律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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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8 훈격 독립장
1920년 최시흥(崔時興) 등과 함께 평북(平北) 천마산중(天摩山中)에서 무장 항일 결사(武裝抗日結社)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하여 왜적(倭敵)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경(日警)과 부일배를 처단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1923. 6월 천마산대(天摩山隊) 대표(代表)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창조파(創造派)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자 이에 참가하였다가 참의부(參議府)분리(分離)된 후 1925년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 당시에는 제2사령장(司令長)으로 통의부(統義府)와의 재결합(再結合)을 시도하였고 참의부(參議府)로 다시 개명(改名)된 1926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제3중대장(中隊長)으로 활동하였으며 3(府)통합 당시 국민부(國民府) 결성에 참여, 동부(同府)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집행위원회(執行委員會) 위원(委員)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위원(委員) 등을 지냈고 1933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장(中隊長)으로 활동한 반면 1928년 참의부(參議府) 중앙호위대(中央護衛隊) (長) 차천리(車千里)를 암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계속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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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북 희천(熙川) 사람이다.

만주지역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심용준은 3·1운동 발발 다음 해인 1920년 최시흥(崔時興), 최지풍(崔志豊) 등과 함께 평북 천마산중에서 무장항일결사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경과 부일배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3년 6월 3일에는 천마산대 대표로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를 비판하는 성명 발표에 서명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서간도(西間島)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기관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양세봉, 문학빈(文學斌)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대한통의부에서 참의부(參議府)가 새로이 독립한 후 1925년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가 조직되면서 제2사령장(司令長)으로 통의부와의 재결합을 시도하였으며, 참의부로 다시 개명된 1926년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참의장 윤세용(尹世茸), 사령장 박응백(朴應伯)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정의부(正義府) 대표 현익철(玄益哲), 신민부(新民府) 대표 송상하(宋尙夏) 등과 함께 참의부 대표로서 국민부(國民府) 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3부통합회의가 실패한 후, 같은 해 12월 신민부 군정파(軍政派), 정의부 탈퇴인사, 참의부 주류세력들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자 그가 주도하는 참의부의 일부 세력은 정의부 및 신민부 민정파(民政派) 등과 1929년 3월부터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3부의 통합을 결의하고 1929년 4월 1일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해체를 선언하였고, 국민부라는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였다. 국민부는 군정부나 유일당의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주도로 조직된 것이었다.

국민부에서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심용준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29년 12월에 창당된 이 정당은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이룩된 것이다. 조선혁명당의 기본 임무는 민족적 대당을 형성하여 혁명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면 과업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지도 육성하는 일이었다. 조선혁명당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수행의 새로운 기반 형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33년 4월 25일 환인현(桓仁縣) 북전자(北甸子)의 산속에서 개최된 국민부 장교회의에서 제3중대장으로 무송현(撫松縣)에서 활동하도록 결정되어 부하 40여명을 거느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217面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179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304面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128·131·146·147·149面
  • 1920年 3月 1日 天摩隊成立紀念 懷中時計(獨立紀念館 寄贈)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31·279·280·294·482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8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0輯 450· 468· 469·618·650∼652面
  • 東亞日報(1925. 5. 6)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23·127·128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323·324面
  • 한국독립운동사연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第1輯 396·40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462·472·482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심용준 심용제(沈龍濟), 심사율(沈士律), 심학산(沈鶴山, 沈學山) 평북 희천(熙川) 국민대표회의
본문
1896년 5월 10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서면(西面) 극성동(克城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심용제(沈龍濟)·심사율(沈士律)·심학산(沈鶴山)·(沈學山)을 사용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직후 최시흥(崔時興)·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최천규(崔天柱)·김세진(金世鎭) 등과 함께 평북 의주군(義州郡)·구성군(龜城郡)·삭주군(朔州郡) 경내에 위치한 천마산에 근거를 둔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하고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천마산대는 독립운동자금 모집, 일제 주요기관 파괴, 일제 군경과 친일행위자 처단을 주요 목표로 한 단체이다.1920년 8월 천마산대 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3월 하순경 대원 11명과 함께 평북 희천군 서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평북 초산군(楚山郡) 도원면(桃源面)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같은 해 7월 19일 천마산대 참모 박응백(朴應伯) 등 19명과 함께 평북 창성군(昌城郡) 대유동경찰주재소를 공격하여 무기를 획득하였다. 1922년 3월 초순 대원 5명과 함께 희천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 채군선(蔡君仙)과 함께 천마산대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각 단체 대표들과 “국민이 위탁한 사명을 받들어 국민적 대단결을 도모하며 독립운동의 커다란 방책을 확립하여 통일적 기관 아래서 대업을 기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6월 3일 각 단체 대표자 56명과 함께 창조파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22년 8월 의군부(義軍府)·광복단(光復團)·광한단(光韓團)·흥업단(興業團) 등 단체가 통합하여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가하여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통의부에는 조직 당시부터 공화주의 계열과 복벽주의 계열 사이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군사력을 지휘하는 문제까지 더해져 갈등은 점차 높아졌다. 결국 1923년 2월 복벽주의 계열이 통의부에서 이탈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24년 4월 1일 통의부 의용군 1·2·3중대,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 78명이 모여 육군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최지풍·박응백·김상옥(金尙沃)·김용택(金龍澤)·김득성(金得成)·맹성록(孟性祿)·유광흘(劉光屹) 등 20명과 함께 제3중대 대표로 참가하여 「남만 군민에게 경고함」이라는 격문과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격문에서는 통의부 내부에 “왜(倭)를 물리치려는 마음은 꿈속에서도 갖지 않고 (중략) 언제나 타인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이익으로 삼고 권력을 탐하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일삼”는 세력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선언문에서는 독립을 위해서는 단결해야 하므로 임시정부의 “직할”로 활동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통의부를 이탈하여 임시정부의 직속 부대임을 표명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였다.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위 육군군사회의에 참석했던 대표들과 함께 1924년 5월 “민족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1924년 9월 14일 지안현(輯安縣)에서 통의부 의용군 간부 문학빈(文學彬)의 부하인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가 통의부에서 이탈한 참의부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을 사살하였다. 백광운이 사망한 이후 참의부장 대리를 맡았다. 최석순·김우근(金宇根)·최지풍·최진무(崔鎭武)·홍석호(洪碩浩) 등과 함께 백광운의 부고를 1924년 10월 30일자 『신한민보』에 게재하였다.이후 1924년 말~1925년 초까지 참의부 제3중대 간부로 활동하였다.1925년 1월 지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에서 조직된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에서 헌병대장에 선임되었다. 헌병대는 지안현·환런현(桓仁縣)·린장현(臨江縣)에 15개 총관소(總管所)를 설치하고 3~5명을 배치하여 일반군인을 감시·감독하고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5년 초 참의부 제2사령부 사령장, 진동도독부 헌병대장을 겸하여 제3사령으로 활동하였다.1925년 3월 19일 통의부와 참의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환런현과 콴뎬현(寬甸縣)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윤세용(尹世茸) 외 68명의 항일운동가들이 모여 남만평화회의(南滿平和會義)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 참의부 제2사령장으로 참가하여 통의부 의용군 제1지휘관 문학빈과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하였다. ①쌍방은 모두 소속 군대에 정전(停戰)을 명령하여 속히 정전시킬 것 ②쌍방 모두 소속 최고관부에 청원하여 정전을 요구하고 남만전지방대의원회(南滿全地方代議員會)를 소집하여 대회 공결(公決)에 복종하도록 할 것 ③본 조약 체결 후 만일 위반 행동이 있을 때는 대의원회에서 적으로 간주하여 정토(征討)할 것. 단 대의원회의 소집권은 차정전(車正田)·주창자(朱昌子)·윤세용 외 66명에게 위임하고 대의원회는 쌍방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취할 것 등과 같은 합의를 이룬 이후 통의부와 참의부가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진동도독부 내 주전파(主戰派)는 위 합의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1925년 4월 진동도독부 대의원들은 퉁화현(通化縣) 강산(崗山) 이도구(二道溝) 예수교회에서 회의를 열고 대한임시정부주만독판부(大韓臨時政府駐滿督辦府)를 조직하였다. 조직 당시 독판부 사령장에 선임되었다. 5월 독판부라는 명칭은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특사에 의해 참의부로 환원되었다.1925년 6월 통의부 제3소대장으로서 부하 30명과 함께 삼수(三水)·풍산(豊山)·장진(長津)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1925년 말 참의부 군사부 사령부위원으로, 1926년 초에는 참의부 사령장, 헌병대장, 제4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1928년 5월 12일 판시현(盤石縣)과 싱징현(興京縣)에서 열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를 계기로 참의부는 심용준파와 김소하파(金篠夏派)로 나뉘게 되었다. 민족유일당 조직 방법에서 심용준파는 “단체본위조직론”을, 김소하파는 “개인본위조직론”을 주장하였다. 단체본위조직론은 기존의 작은 단체를 기초로 하여 그들을 연합하는 방식으로 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본위조직론은 기존의 단체는 대부분 지방적이고 파벌적이므로 개인위주로 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소하파가 심용준파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측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1928년 9월 초 참의부 중앙호위대장 차천리(車千里)를 처단하였다.1928년 9월 정의부(正議府) 주류파, 신민부(新民府) 민정위원회계열(民政委員會系列)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결성하였다. 1929년 3월 지린(吉林)에서 참의부 대표 임병무(林炳武)·유광흘, 정의부 대표 이동림(李東林)·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고할신(高轄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신민부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거쳐 3부가 통합하여 4월 1일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국민부 조직이 완비될 때까지 이동림·이교원·현익철·고이허와 함께 통합을 위한 잔무처리(殘務處理)를 담당하였다.1929년 5월 28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서 중앙집행위원과 외무부담임위원에 선임되었다.1929년 이영희(李英熙)·박대호·김소하·장기초 등과 함께 환런과 퉁화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행위자를 처단하였다. 8월 국민부에서는 만주 중국관헌에게 일제의 만몽침략정책(滿蒙侵略政策)에 대한 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일본통화정촌영사분관(日本通化檉村領事分館)에서는 중국 당국에 체포를 요구하였다.1932년 초부터 1933년 말 사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33년 4월 25일 환런현 북전자(北甸子)에서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퉁화현 제5구(第)5(區) 강전자(江甸子)에서 일제에 붙잡힌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강옥성 후임으로 조화선을 선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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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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