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08년 1월 보창학교(普昌學校)에 재학 중 학우 17명과 함께 단지동맹회(斷指同盟會)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잘라 국권회복을 위한 결의를 굳게 하였다.
1909년 5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북간도선교단(北間島宣敎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9월 강봉우(姜鳳羽)·윤명희(尹命熙) 등과 함께 용정 신촌(新村)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의 실시에 힘썼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지역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시위에서 그의 장남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그는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의 재무위원으로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결사대를 조직하는 한편 국민의회(國民議會)의 보조기관으로 애국민단(愛國民團)을 조직하고 명동(明東)학교에서 개최된 북간도 국민의회 간도지부협의회(北間島 國民議會 間島支部協議會)의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6월 나자구(羅子溝)에 있는 덕흥학교(德興學校)에서 일민신문(一民新聞)을 발간하고 청년들을 모아 맹호단(猛虎團)·충열대(忠烈隊)·결사대(決死隊) 등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군정사후원회(軍政司後援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0년 1월 간도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으며 국민회의 재무위원으로 각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공급하여 주는 업무를 맡아 이에 진력하다가 1921년 용정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그후 그는 1923년 김약연(金躍淵)·정재면(鄭載冕) 등과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에는 대한국민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도 교육·문화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796·812·828·829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2輯 358·359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70面
-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39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6卷 83·177·192·193·198·199·206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7卷 114·115面
- 間島獨立運動小史(洪相杓) 8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94面
- 朝鮮民族運動年鑑 41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5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3輯 16·36·37面
- 資料韓國獨立運動(秋憲樹) 第4(下)輯 1528面
- 間島開拓史(尹政熙)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0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