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11.19 목포 (木浦) 공립상업학교 (公立商業學校) 에 재학중 (在學中) 1929.11.3 광주 (光州) 에서 대대적 (大大的) 인 학생 독립운동 (學生獨立運動) 이 전개 (展開) 되었다는 소식 (消息) 을 전 (傳) 해 듣고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반대 (總督府暴壓政治絶對反對) 」「치안유지법 철폐 (治安維持法撤廢)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被壓迫民族解放萬歲) 」등의 대기 (大旗) 와 격문 (檄文) 수천 매 (數千枚) 를 제작 (製作) 하여 목포시내 (木浦市內) 요소 요소 (要所要所) 에 살포 (撒布) 하며 시위 (示威) 를 하다 피체 (被逮) 되어 징역10월을 받고 1년2월간 (月間) 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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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목포공립상업학교(木浦公立商業學校) 4학년으로 재학중이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동년 11월 16일 이광우(李光雨)집에서 박사배(朴仕培)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목포상업학교에 재학중인 한국인 학생을 규합하여 동맹휴교를 결행하며 시위할 것 등을 결의하고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반대', '치안유지법 철폐', '피압박민족 해방만세' 등의 큰 깃발을 제작하였다. 1929년 11월 19일 양재욱이 준비한 등사판으로 격문을 수천매 인쇄하여 수업시간 중에 거리로 뛰쳐나가 목포역전까지 시가행진하며 격문을 살포하고,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반대' 등 구호를 고창하며 미리 만든 깃발을 흔들며 시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30년 11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30. 3. 20 光州地方法院)
- 判決文(1930. 11. 20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565∼57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67∼273面
- 豫審終結決定書(1930. 2. 24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9卷 411∼414·437·442面
- 東亞日報(1929. 12 28, 1930. 1.9, 3. 4, 11. 3, 12. 3,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