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1919년 한족회(韓族會)에서 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동지규합에 힘썼다고 한다.
1922년 8월 통의부(統義府) 결성에 참여하여 산업위원(産業委員)과 실업위원장(實業委員長)에 선임되었으며 1923∼1924년에는 군무국장(軍務局長)과 선전부장(宣傳部長)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1924년 7월 12일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재통일을 위하여 개최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 籌備會)에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대한통의부 대표로 참여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학우회(學友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의성단(義成團)·변륜자치회(卞倫自治會)·고본계(固本契)·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등 10개 단체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1925년 1월 정의부는 동삼성 화전현(樺甸縣)에 근거를 두고 통화(通化)·환인(桓仁)·흥경(興京)·관전·즙안(輯安)·임강(臨江)·장백(長白)·유하현(柳河縣) 등 8개현을 관할하였는데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생계위원장에 선임되는 한편 무력사령부(武力司令部) 부사령(副司令)이 되었으며 그후 동년 12월 23일 선전위원, 선전위원장, 산업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활동을 벌였다.
1927년 8월 24일 동삼성에 있던 18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전민족유일당(全民族唯一黨) 조직을 위하여 단체대표자회의를 가졌으나 협의회(協議會)와 촉성회(促成會)의 양파로 분립되자 이때 그는 촉성회측에 속하여 이청천(李靑天)·김원식(金元植)·김상덕(金尙德)·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를 탈퇴하고 재만유일당책진회(在滿唯一黨策進會)를 조직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공산계의 세력을 배제하고 재정비할 때 이호원(李浩源)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되었고, 그는 보안부위원장(保安部委員長)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17일 조선혁명당의 중앙간부가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 지방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있음을 탐지한 일본 영사관원이 회의장을 포위하여 동년 1월 19일 그는 이호원 중앙집행위원장 및 조선혁명당 군사령 김관웅(金寬雄)·동사령부 간부 이규성(李奎星) 등 10여명의 간부와 함께 붙잡혔다.
그는 1932년 11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17·119·126·127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830·896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0卷 178·179面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740·749·750·752·776·777·797·862·870面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5卷 91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國會圖書館) 849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126·128·152·163·164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62·281∼283·45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434·437·486·498·572·592·635·64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7卷 466·710·712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13面
- 東亞日報(1932.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