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육군 참위 (陸軍參尉) 로 복무 중 (服務中) 군대해산 (軍隊解散) 으로 면관 (免官) 된 후 (後) 전북 익산 일대 (全北益山一帶) 에서 의병 (義兵) 을 모집 (募集) 의병장 (義兵將) 으로 활동중 (活動中) 피체 (被逮) 되어 1908년 전북재판소 (全北裁判所) 에서 유형 (流刑) 10년을 받고 복역 (服役) 중 (中) 2월 후 (月後) 탈출 (脫出) 하여 대둔사 (大屯寺) 에 의진 (義陣) 을 설치 (設置) 하고 활동 (活動) 하다가 1908년 해남 (海南) 영암 (靈岩) 등지 (地) 에서 150여명 (餘名) 의 의병장 (義兵將) 이 되어 육지 (陸地) 와 해상 (海上) 에서 40여회 (餘回) 에 걸친 전투 (戰鬪) 를 참가 (參加) 하고 많은 전공 (戰功) 을 세운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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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7년 전북 익산(益山) 지방에서 윤현보(尹賢甫)·이봉오(李奉五) 등과 함께 황준성(黃俊性)을 의병장으로 삼아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그 뒤 1908년 3월 3일 유형(流刑) 10년을 선고받고 전남 완도(莞島)에 유배되어 있던 중 황준성·이봉오 등과 함께 탈출, 해남(海南)·영암(靈巖) 등지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황준성이 미황사(美皇寺)에, 황두일(黃斗一)이 대흥사(大興寺)에 각자 의소(義所)를 설치하였을 때 그는 대둔사(大屯寺)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이후 1908년 8월부터는 해남·영암 등지에서 150여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육지와 해상에서 일군과 대소 40여 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1909년경 부하 6명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官報(第4041號, 1908. 4. 7)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72·84面
- 韓民族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1卷 412面
- 高宗時代史(國史編纂委員會) 第6卷 736面
- 奎章閣日記(國史編纂委員會) 105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645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4輯 441面
- 秘錄韓末全南義兵戰鬪史(全南日報社編) 17·120·127·168·40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920·922∼92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