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규린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출옥 후에도 그는 항일의식을 굳게 지키며 독립운동에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6년 1월 경북 대구에서 김창숙(金昌淑)의 밀명으로 경북 지역의 담당자로 파견된 정수기(鄭守基)와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1926년 1월 군자금 모금차 중국으로부터 밀입국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김창숙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유림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으며 유림단(儒林團)이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4월에 발각되어 9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399면
- 동아일보(1927. 2. 11)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2집 31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36면
- 벽옹김창숙일대기(심산사업회) 97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50·288면
- 예심종결결정서(1927. 1. 21. 대구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