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전남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8년 무안군 지도면(智島面)에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양명여학교(陽明女學校)를 설립하여 청년층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여성교육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1922년 12월 서울에서 조선물산을 장려하여 자급자족정신을 기를 목적으로 자작회가 조직되자, 이듬해 2월 전남 무안자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소비조합부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4년 봄 향리에서 소작인공조회(小作人共助會)를 조직하여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면서 소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25년 2월 27일 소작인공조회의 소작쟁의를 탄압하려는 일경에 의해 다른 간부 6명과 함께 붙잡혀 같은 해 7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 10월에는 무목(務木:무안, 목포)청년연맹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목포경찰서에 검속되어 다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어 지방지회를 설립하여 가자, 같은 해 6월 전남 목포에서도 신간회 목포지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 목포지회는 같은 해 12월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이때 서병인·김명진 등 10여 명과 함께 간사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1932년 1월부터 1933년 6월까지 활동하였고, 이어 1934년 4월 창간된 종합잡지 호남평론의 편집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일보(1925. 2. 27, 1926. 1. 20)
- 동아일보(1924. 12. 22, 1925. 1. 13, 1. 16, 2. 6, 3. 4, 3. 27, 4. 3, 5. 28, 6. 29, 1926. 10. 15)
- 판결문(1925. 7. 3 광주지방법원)
- 사건기록보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