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7년 2월 이후 대구공립농림학교 재학 중에 박광세(朴光世) 등에게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들었다. 권태호는 김낙형(金洛衡) 등과 함께 이에 공감하고,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에 기반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들은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경상북도 책임자 장적우(張赤宇, 張弘相)에게서 단체를 조직할 것을 권유받았다. 더불어 김낙형이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1월 이후 권태호 등이 이에 찬성해 강령으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의 함양’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을 내세우며 신우동맹을 조직했다. 권태호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제3그룹의 책임자로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선도했다. 또한 대구지역의 각 중등학교에 공산주의를 알리고자 학교별 선전위원을 뒀다. 회원들은 완전한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신우동맹을 해산하기로 했다.
12월 27일 권태호 등은 혁우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의 함양’과 ‘조선민족의 해방운동’이라는 강령 아래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 말라’, ‘피압박민족의 절대승리를 하자’는 표어를 채택했다. 또한 비서부 등 6부를 구성해 운영조직을 체계화했다. 권태호는 김낙형과 함께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대중기반조직인 ‘야체이카’를 채택해 공산주의 연구와 조직 확장을 했다. 1928년 2월 중순에는 중앙간부와 야체이카 회원 하나로 큰 결사를 조직하기 위해 혁우동맹을 해산했다.
1928년 2월 26일 권태호 외 14명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꾀하고, 모순된 사회현상을 타파하여 만인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적우동맹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전의 신우동맹과 같은 강령 아래 7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매년 4월 정기총회, 매월 1회 간부회와 월례회, 매주 1회 그룹회 개최, 매월 회비 10전을 규약으로 정했다. 4월 22일 권태호는 정기총회에서 조직부 위원으로 선출됐으나 이후 조직 내 갈등으로 이탈자가 속출해 4월 28일 적우동맹을 해산했다.
4월 30일 권태호 등 6명은 다시 일우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 함양’, ‘학생운동 실천’을 강령으로 정했다. 규약으로는 매년 4월과 9월의 정기총회, 매월 1회 간부회, 매주 1회 월례회, 그룹회 수시 개최, 매월 회비 10전으로 결정했다. 권태호는 일우당에서도 조직부를 담당했다. 5월 12일 권태호는 이인팔(李仁八), 권영구(權寧九), 김정섭(金貞燮)에게 일우당 임시총회 참석을 권유해 같은 날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가입시켰다. 동시에 권태호는 조사부 위원으로 재선출됐다. 일우당은 간부회와 월례회를 열어 공산주의에 관한 토론과 연구활동을 했으나 당원 간 반목과 비밀누설의 우려로 해산했다. 그러나 9월과 10월 동맹휴교를 주도한 후 비밀결사를 조직한 사실이 발각돼 권태호를 비롯해 40여명이 체포됐다.
권태호는 1927년부터 약 2년간 공산주의에 기반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주요 간부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확정됐다. 이후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2년 3월 29일 만기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0. 3. 11)
- 동아일보(東亞日報)(1928. 12. 13, 1929. 8. 8, 9. 13, 9. 19, 10. 22, 1930.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