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반일민족사상(反日民族思想) 고취를 위하여 김구(金九), 최명식(崔明植) 등 수십 명의 동지와 같이 안악지구 신민회(新民會) 및 면학회(勉學會)를 설립 운영하고 그 운영위원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활약하였다.
나라를 일본에 강점 당한 후 1911년 1월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연루자로 누명을 쓰고 김구, 최명식과 같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등으로 크게 고통을 겪다가 두 달 뒤에 풀려났다. 이는 사내정의(寺內正毅) 조선총독 암살미수사건(일명:안명근사건)이라는 날조된 사건으로 신민회 등의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었기에 예비구속된 것이다. 이것이 105인사건(百五人事件)과 같은 류의 날조된 억지굴레사건이었다.
1916년 김구, 최명식 등이 출옥한 후 그는 자기 소유인 동산평(東山坪)농장에서 민족운동을 위해 암중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국내외 여건의 성숙으로 3.1독립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발발, 확대되자 김구와 최명식으로 하여금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하도록 여비 3,000원을 조달, 출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는데 숨은 후원자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만들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내 독립투사들의 가족생계를 위하여 농장 등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후원, 생활케 하였다.
1921년 동지 최명식이 임정의 사명을 띠고 고향에 와서 그를 찾았다. 최명식은 국내에 연통제 조직의 임무를 띠고 들어왔음으로 그에게 황해도 내 11개 군에 연통제를 조직 편성할 임무를 맡겼으며, 이에 그는 즉시 극비밀리에 황해도 내를 순방하면서 도내의 유지를 포섭 연통제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이 조직을 통하여 1922년 초 연통제가 소멸될 때까지 각 지역을 다니면서 군자금의 모집 조달, 기밀문서의 전달, 독립운동 상황의 정보 교환 등 맹렬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5년 12월부터 1934년 3월까지 김구, 최명식 등 애국지사 가족을 찾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등 계속 활동하였으며, 이밖에도 안악중학교, 안악여자중학교, 서울 경신(儆新)학교 등을 설립, 지원하는 등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9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61 6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8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50면